사상마련

2003년 어느 날, 왕양명을 읽은 기록

by 발태모의 포랍도

공부하고 가르칠 때 주로 서양 전통 사상과 지성사에 집중하는 편이지만, 오래전부터 내 관심은 그보다 더 넓게 뻗쳐 있곤 했다.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에 우선순위를 따지면 한 여섯 번째쯤 될 것 같은 작은 연구가 있는데, <맹자>의 한 구절에 천착하는 논문이다. 좀 발전시켜서 내년 초에 미국철학학회에서 발표부터 해 보려 하는데,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할 시간에 먼 훗날 계획을 잠시 떠올렸다가 괜히 오래된 자료들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러다 사실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유학서는 <전습록>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18년 전 <전습록>을 처음 읽고 적어 둔 감상 중 일부를 개칠 없이 아래에 옮겨 본다. 미숙함과 조숙함이 묘하게 섞여 있는, 그야말로 '학생' 때의 생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1. 지행합일(知行合一)이냐, 선지후행(先知後行)이냐?


陽明선생의 사상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知行合一’ 일 것이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하나라는 이 주장은 朱子의 ‘先知後行’과 대비된다. 그러나 이 둘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밝히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다. 이 두 주장은 해석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서로 정반대의 주장으로 생각될 수도 있고 또한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甲이 실제로 효도를 행하지 않을 때, 朱子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은 甲에게 “당신은 효도를 ‘알고’ 있긴 하지만, ‘행하지’는 않고 있다. 즉, 도문학道門學의 공부는 했으나 존덕행尊德行 공부를 소홀히 한 격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陽明선생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은 이에 반박할 수 없는가? 甲처럼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이러한 상황을 陽明은 생각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知行合一’을 고수하면서도 甲의 상황을 해석해낼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사태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甲은 아직 효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知行合一’과 ‘先知後行’의 단순한 비교는 더 이상의 깊은 논의를 이끌지 못한다. 때문에 문자 너머에 있는 진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陽明선생의 ‘知行合一’은, 시간적인 선후관계에서 앎의 순간과 행위의 순간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때의 ‘知’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致知’이며, ‘行’은 곧 ‘篤行’이다.* 즉 ‘知行合一’은 지극히 앎과 독실히 행함은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知行合一’은 좀 더 구체적으로 ‘(致)知(篤)行合一’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陽明선생의 생각과 朱子의 생각 사이의 소모적인 단순비교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앎과 행위 사이의 선후관계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알고, 독실히 행하는 것이다. 물론 지극히 안다는 것(致知)은 대학 8조목 중 하나로서 격물, 성의, 정심, 수신 등의 과정과 얽혀 있다.*


2. 사상마련(事上磨鍊), 체인(體認), ‘고요해도, 움직여도 안정될 수 있다(靜亦定, 動亦定)’


陽明선생의 사상마련은 과히 인상적이었다. ‘공부’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공부’라는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한다. 특히 학생의 경우는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말이 “공부해라”일 것이다. 우리는 ‘공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학생’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한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있어서 공부는 보통 학교에서 배우는 활동(교과서를 통해)을 의미한다. 선생님이 칠판에 쓰는 것을 받아 적고, 교과서에 밑줄 치고, 암기하고, 문제집을 푸는 과정이 공부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보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아이는 곧바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된다.


실제로 깊이 있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현실을 개탄할 것이다. 공부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선학들의 사유를 스스로 읽고, 사고하고, 자신에게 묻는 과정이며, 심신을 수양하는 것이라고 반문하며 말이다. 허나, 陽明선생의 공부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에게 공부는 비단 정신적인 사유 과정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서, 매사에 늘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고요히 앉아 마음을 다스리는 것(黙坐澄心)과 같은 고차원적인 정신활동뿐만 아니라, 재난을 만났을 때,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 역시 공부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맞음에,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孟子의 말(必有事焉)은 陽明선생에 의해 이렇게 해석된다. 이것은 곧 사상마련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공부는 ‘체인體認’*이라는 경험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을 몸소 인식하는 것,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성현의 말씀을 수차례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또 암송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만약 스스로 체인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공부가 아니다. 반드시 자기에게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傳習錄』의 ‘傳習’도 자신을 돌아보는 공부가 아니던가?*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은 고요해도 안정되고, 움직여도 안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고요히 정좌하면서 우주의 작동 원리를 몸소 느낄 수 있으며, 거친 풍파 속에서도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고요함’과 ‘바삐 움직임’이라는 외부적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그 상황을 주재할 수 있는 단계이다.


3. 마음(心), ‘마음이 곧 천리다(心卽理)’, ‘천리를 보존하고, 사욕을 버려라(尊天理 去人欲)’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지극히 알고 독실히 행하는 것’, ‘매사에 일삼음이 있어야 하고 늘 갈고닦는 것’, ‘몸소 체득하는 것’, ‘때에 무관하게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주재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본래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상태이다. 여기에 의념이 발동하면 선과 악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선과 악을 아는 것이 陽明선생이 말하는 양지良知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격물格物이다.* 朱子가 즉물궁리卽物窮理를 강조하는 데 비해서, 陽明선생의 공부는 모두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다. 이치(理)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즉리心卽理라 한다. 마음은 하늘(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지만, 사욕이 생길 경우 혼미해질 수가 있다. 마음을 거울로 비유해볼 때, 티끌 하나 없는 맑은 거울(천리를 보존하고 있는 마음)에 거무스름한 때(사욕)가 끼어 거울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모든 공부는 ‘천리를 보존하고, 사욕을 버리는(尊天理, 去人欲)’로 시작하여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존천리, 거인욕尊天理, 去人欲’의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는 계신공구戒愼恐懼*가 제시되고 있다.



*주*

* “若不知立言宗旨, 只管說一箇兩箇, 亦有甚用?” (『傳習錄』권상 5조목 중에서), 陽明선생은 여기서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행하는 단순한 ‘知行合一’과 ‘先知後行’의 대비를 비판하고 있다.

* “博學, 審問, 愼思, 明辨, 篤行” (『中庸』 20장 중에서)

* “知是行的主意, 行是知的功夫” (『傳習錄』 권상 5조목 중에서)이라는 선생의 말은 앎과 행위의 상보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의 ‘앎’이 단순히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제되지 않은 정보들 일순 없고, ‘행위’가 무의식적인 혹은 우발적인 행위 일리 없다. 모두가 ‘공부’의 과정에서 추구해야 할 높은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 “然吾之心與晦庵之心未嘗異也.” (『傳習錄』권상 98조목 중에서), 선생은 朱子의 학설을 꼬집어 비난하는 학우들에게 위와 같이 얘기했다. 선생은 본인의 마음이 朱子와 통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후학들에 의해 ‘陽明學’, ‘朱子學’이란 이름으로 고착화된 학문의 영역을 살피기 전에, 인간 守人과 熹가 시대적으로 특수한 사명을 가지고 사유했던 맥락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傳習錄』권하 317조목 참조.

*“體認者, 實有諸己之謂耳.” 『王陽明全集․與馬子薪』권 6, 218쪽(『傳習錄(1)』정인재․한정길 옮김, 청계 출판사, 2001, p.141에서 재인용)

* “學須反己” (『傳習錄』권하 245조목 중에서)

*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不傳習乎?” (『論語』, 學而 4章)

* “靜亦定, 動亦定” (『傳習錄』권상 23조목 중에서)

* “無善無惡是心之體, 有善有惡是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傳習錄』권하 315 조목 중에서, 이 가르침을 특별히 사구교라 한다.)

* 물론 ‘실재성’의 문제를 언급하자면, 마음 밖에도 사물이 실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미성’에 주목한다면 陽明선생의 ‘心卽理說’에 충분히 동감할 수 있다. (『傳習錄(2)』정인재․한정길 옮김, 청계 출판사, 2001, p.741에서 275조목 해설 참조.)

* 『傳習錄』권상 122조목 참조.

매거진의 이전글<기생충>에 대한 짧은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