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집 중에 하필 우리 집을 택하고 현관문 위에 둥지를 튼 새들이 있었다. 아메리칸 로빈이라고 여기서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종인데, 우리가 지빠귀 혹은 울새로 부르는 새와 가까운 모양이다. 찾아오는 새들 중 두 마리는 대충 분간할 수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가슴 색이 연한 것이 암컷, 진한 것이 수컷이라고 했다.
둥지는 며칠이 지나서야 완성됐다. 나뭇가지, 비닐 조각 등을 물어와서 기초 공사를 하더니, 금세 진흙도 가지고 와서 사이사이에 발랐다. 동그랗게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둥지의 키를 높이는 모습을 곁에서 관찰했다. 기막힌 솜씨였다.
바닥을 까는 것을 마지막으로 둥지를 완성하자 어미새가 곧 알을 낳았다. 처음 보는 청록 빛이라 그런지 더욱 오묘한 느낌이 났다. 어미와 아비가 번갈아 둥지에 오는 듯 했고, 거리를 두고 지켜 보니 알을 살짝 품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나는 새들이 자리를 뜨면 의자를 밟고 손을 뻗어 유리창 너머로 사진을 찍어서 둥지 속을 슬쩍 확인했고, 알 위치가 조금 달라져 있으면 둘 중에 누가 왔다 갔겠거니 짐작했다.
둘이 함께 있는 것도 한 번 목격했다. 어미가 둥지를 지킬 때, 아비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 같았다. 다시 검색을 좀 해보니, 아메리칸 로빈은 어미와 아비가 모두 알을 품는다고 했다. 잉태하는 일이 온전히 엄마의 몫인 우리와 다른 점도 새삼 새로웠다.
바로 그 다음 날, 알이 두 개로 늘었다. 처음부터 새 식구들의 등장을 무척 반기던 작은 아이는 어미가 알을 하나 더 낳을 줄 이미 알고 있었다며 뛸 듯 기뻐했다. 새들은 연신 오고 갔는데,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둥지를 지키는 시간이 이제 아주 길어진 것이다. 새는 알을 모두 낳기 전까지는 먼저 낳은 알을 오래 품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새끼들의 부화 시기가 얼추 비슷하도록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설명이다.
알을 다 낳은 것일테니 이제 두 주 정도는 있어야 새끼가 알에서 깨어날 수 있다던데 그 때까지 무탈할 수 있을까 염려도 했고, 어릴 때 배워 그간 비유로만 쓰던 啐啄同時의 현장을 이제 곧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기대도 품었다.
새들이 둥지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우리는 현관문으로 아예 드나들지 않기로 했다. 영문을 모르는 강아지 아폴로도 늘 뒤로 돌아 다녔다.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공부방에서 나오다가 둥지를 지키는 어미와 아비의 모습을 마주칠 때면 마음이 동하곤 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이렇게 우리에게 기대감을, 또 활력을 줄 수 있구나 싶었고, 애쓰는 어미, 아비의 모습도 애틋했다.
그러던 어느날, 언제나처럼 새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둥지 속을 살폈는데, 청록 빛깔 두 알이 온데간데 없고 둥지는 텅 비어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茫然自失이라는 말이, 혹은 영어 표현으로 stupefied 라는 표현이 딱 들어 맞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마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른 아침 유난히 시끄럽게 주위를 배회했다던 까마귀 떼가 아닐까 싶다. 본디 非情한 자연의 이치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이 참 아팠다. 없던 것이 생겼을 때의 기쁨과 있던 것이 사라졌을 때의 아픔, 어찌 보면 대부분의 즐거움과 슬픔의 밑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원초적인 두 감각을 절실히 느꼈다. 불현듯 찾아 온 새들 덕분이다.
어미새와 아비새는 어찌 추스르고 있을까? 새라는 종이 희노애락을 어떻게 느끼고 다스리는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둥지를 찾은 그네들을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어느 작은 새가 현관 위에 자리를 잡자, 어디선가 냉큼 날아와 빈 둥지 옆을 지키고 침입자를 쫓았다. 아비새 같았다. 그리고는 둥지 옆에서, 또 둥지에 성큼 발을 넣고서, 어딘가를 응시하며 한참을 그렇게 머물렀다. 집 안에서도 둥지로 돌아 온 그를 유리창 너머로 목격한 일이 있는데, 이때도 그는 둥지 한편에 살포시 걸터 앉고는 미동도 없이 허공만 바라 보는 것이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나 역시 그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 보았고, 새는 한참 후에야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