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탐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태모의 포랍도 Jan 03. 2022

순교와 배교의 역설

[탐구: 내면과 믿음] 로드리고와 오긴의 선택

2007년 3월에 어딘가에 적어 두었던 감상을 발견했다. 공군사관학교 교수 요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데, 그때 교수부 건물이었던 단재관 바로 건너편에는 도서관이 있어서 머리도 식힐 겸 자료도 찾을 겸 자주 들리곤 했다. 타 도서관 자료를 복사하여 배송받는 서비스를 내가 하도 많이 신청해서 담당 군무원 분과 친해진 기억도 있다. 그분은 배정된 예산을 몇 년 만에 다 썼다며 이제 예산 증액을 신청하겠다고 좋아하셨다. 대부분은 본인의 조직과 재량이 커지는 것을 기꺼워하니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의 <침묵>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보다 수년 전에 어느 자리에서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송재룡 교수님을 뵌 적이 있는데, 그때 <침묵>에 대한 이야기를 얼추 들은 경험이 있어서 반가움 마음에 읽었던 기억이다. 송 교수님은 나중에 안식년을 지내러 유펜에 오신 적이 있어서 그때 다시 만나 뵐 수 있었다.



엔도 슈사쿠와 <침묵> 초판 표지 | 사진 출처: 주간조선


<침묵>을 읽을 즈음에 나는 일본 학자 중에서는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을 가장 즐겨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아래와 같은 감상을 남겼지 않나 싶다. 영글지 않은 생각의 한 조각이지만 기록 삼아 남겨 둔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침묵>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도 몇 년 전에 나왔으니, 그것을 감상하고 좀 더 생각을 더해도 좋겠다.





(상략)


근대 세계의 개인은 이른바 "탈주술화" 과정을 통해 전통과 관습이 '의미'를 주입시켜 주었던 전근대 시대의 굴레로부터 탈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히려 '의미' 상실이라는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내면성을 상실한 공허한 개인은 천박한 전문 지식과 싸구려 감정을 자랑하며, 세상과 삶의 '의미' 역시 상품으로 소비하기 쉽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소설은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깊은 내면세계를 반추하도록 하는 작품이다. 난 이 작품을 약 3년 전에 종교사회학을 전공한 한 선생님의 독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곧 일독하리라는 다짐이 무뎌지고 그와 함께 저자의 이름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 요즘, 우연히 도서관 한켠에서 이 소설을 발견하고 의미 있는 독서를 하게 되었다.


신앙과 배교라는 문제에 대한 종교적인 사색의 값진 경험도 무시할 수 없지만, 과연 도대체 신앙과 배교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깊은 내면의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되물어 볼 수 있었던 것이 의미 있었다 하겠다. 그래서 보잘것없고 비겁한 약한 자에 대한 성찰, 고통과 모멸감을 견디는 고귀함을 간직하려는 노력, 신성神性을 향한 가장 인간적인 고뇌에 탐복함과 동시에, 잃어버린 깊은 내면세계에 대한 동경을 감출 수 없었다.


배교에 관련하여 한 가지 적어둔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정신분석>을 보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오긴>이란 소설이 소개된다. 친부모를 일찍 여의고 기독교 신자인 양부모 슬하에서 자란 오긴은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기꺼이 순교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긴이 돌연 현장에서 배교를 선언한다. 돌아가신 친부모가 천주님의 가르침을 모른 채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에 자기만 천국에 간다면 부모에게 죄송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긴은 양부모에게 부디 천국에 가시라고 말하며 자신은 가르침을 저버린 이상 살아갈 수 없다며 부모의 뒤를 따라 지옥으로 가겠다고 한다.


주목하고 싶은 건 순교하면 천국, 배교하면 지옥이라는 단순한 이분 논리가 아니라, 가라타니 고진의 다음과 같은 통찰이다.


"사실상 오긴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면, 즉 순교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혹은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나 그것을 버린 자는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결단은 의미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오긴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면 이러한 '배교'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의 배교에 오히려 신앙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교異敎가 이겼는지 기독교가 이겼는지 알 수 없다. 이교의 승리에서 기독교가 이겼고, 기독교의 승리에서 이교가 이겼다."


<침묵>의 로드리고 신부의 신앙의 실천을 쉽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현상으로 보이는 순교와 배교의 이분을 넘어, 진실한 순교와 알맹이가 빠져 버린 순교, 기회주의적인 배교와, 심연을 지닌 배교의 차이를, 아니 도대체 이러한 구분 자체가 가능한 조건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평가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인간의 연약함과 고귀함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하략)


2007. 03. 28. 수요일

매거진의 이전글 민주주의와 뻔뻔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