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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Jan 15. 2022

미국 독립전쟁과 프랭클린 가(家)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 이야기] 1770년대

1770년대를 특징짓는 대 사건 중 하나는 단연 미국의 독립전쟁이다. 영국 런던에 아메리카 식민지 개발을 위한 버지니아 회사(The Virginia Company)가 설립된 것이 1606년이다. 당시 버지니아는 북 아메리카 대륙 동쪽 해안 전부를 일컫던 말이었다. 이듬해인 1607년, 현재 버지니아 주 윌리엄스버그에 가까운 제임스타운에 버지니아 회사가 정착지를 세웠다. 그 이전에도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성공적인 첫 영구 식민지는 제임스타운이었다. 이름이 제임스타운이 된 것은 당시 영국 왕이었던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다. 성경의 새로운 영문 번역을 명하여 1611년에 <킹 제임스 성경>을 출판하도록 한, 스튜어트 왕가의 첫 왕이었던 그 제임스 1세다. 그로부터 8년 뒤, 네덜란드로 이주했던 영국의 청교도인들이 버지니아 회사의 일부이자 독립된 조직이었던 플리머스 회사(The Plymouth Company)로부터 아메리카 식민지 땅의 양도 증서를 획득했다. 이들이 메이플라워 호에 올라 대서양을 건너서 지금의 메사츄세츠 주에 새로운 정착지를 세운 것이 1620년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17세기와 18세기에 아메리카 대륙 동쪽에는 영국의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는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등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들도 진출해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미국의 모태가 되는 식민지들은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동쪽의 13개의 식민지다.


18세기 북 아메리카 대륙. 노란색이 영국 식민지 지역이다.


미국 독립전쟁은 물론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살던 신민들이 모국인 영국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독립전쟁이 동시에 식민지에 살던 아메리카인들끼리 편을 나누어 치열하게 대립했던 내전이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한다. 독립을 원해 싸웠던 집단은 스스로를 애국자들(Patriots)이라 불렀고, 영국의 식민지로 남길 바랐던 이들은 자신들을 또 다른 의미에서 애국자들(Loyalists)이라 칭했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가장 잔인한 전투들은 보통 이 서로 다른 애국자들끼리의 싸움이었다. 전쟁은 때로 가족들조차도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 가족이다. 자수성가의 전형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 제국의 수혜를 톡톡히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가장 유명한 아메리카 출신 영국인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혁명가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 지배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보통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프랭클린은 누구보다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프랭클린 곁에는 그와 여러 사업을 함께 도모했던 장남 윌리엄이 있었다. 윌리엄은 옛날 식 표현으로 사생아였다. 영국에서 공부를 마친 윌리엄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출세가도를 달린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아들을 위해 런던 정계에 로비를 했다. 그 덕에 윌리엄은 30대 초반에 당시 뉴저지 식민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실험 중인 프랭클린 부자


언제나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영국인이라 생각하고 영국에 대한 큰 애정이 있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정확하게 언제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만, 학자들은 1774년 1월 영국에서 열렸던 추밀원 회의 하나를 주요한 계기로 꼽는다. 당시 쟁점들을 다 열거할 순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회의에서 영국의 지도자들이 프랭클린을 공개적으로 모욕했고, 그 결과 프랭클린이 자신과 같은 아메리카 식민지 출신 영국인들은 영국 본토인들과 절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독립을 지지할 이유가 없고 혁명을 일으킬 동기가 적었던 프랭클린 같은 사람들조차 더 이상 영국의 폭정을 참지 못하고 독립을 지지하게 되자, 혁명세력은 큰 힘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아들 윌리엄은 생각을 달리 했다. 그는 끝까지 영국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남았다. 뉴저지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고, 주 헌법을 쓰고,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하여 새로 만들어 나가는 연합 국가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에게 반역의 죄를 묻게 되자, 뉴저지 식민지의 지도자였던 윌리엄은 갑자기 반역자로 낙인찍혀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포로 교환을 등의 구실로 나중에 출옥한 윌리엄은 당시 로열리스트의 메카였던 뉴욕으로 이주하여 영국군의 편에 서서 식민지 독립군들을 공격하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게 된다.


마침내 미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로열리스트들은 대거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윌리엄 프랭클린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영국 본토인들이 이들을 딱히 반긴 것도 아니었다. 윌리엄은 비참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전쟁에서 승리한 신생 국가 미국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전쟁 중에도 벤자민 프랭클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외교였다. 그는 주 프랑스 미국 대사였다. 프랑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외교 역시 상당 부분 프랭클린의 몫이었다. 그는 1785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며 영국과의 평화조약을 비롯한 굵직한 외교 사안들을 처리한다. 이미 노령이었던 그는 아예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낼 생각까지 했다.


프랭클린 부자 모두 유럽에 있으면서도 서로 화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이 미국 귀환을 결정하여 영국을 경유하여 대서양을 건널 , 그의 손자이자 윌리엄의 아들(그도 사생아였다) 윌리엄 템플 프랭클린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만남을 추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람끝내 화해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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