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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Oct 28. 2017

직업으로서의 방송작가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되길!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송작가 일을 쉬면서 대학원에 다녔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다.     


시간강사 시절, 매 학기가 끝나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학을 맞이했다. 강의가 없으니 수입도 없는 배고픈 시기였다. 다음 학기에는 몇 학점이나 맡을 수 있을지, 혹시 어렵게 개설한 강의가 폐강되지는 않을지 불안한 마음이 하루하루 커져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가장 여유로워야 할 방학이지만, 불안함과 초조함이란 녀석들이 머릿속에서 점점 자라서 그 귀한 시간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방학 때 느꼈던 불안함의 정체는 아마도 이 방학이 쉼표가 아닌, 마침표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 인문학 수업을 듣는 한 수강생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요즘 왜 TV에서 재방송만 해요? 파업 때문이라던데 언제 끝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공정방송을 만들자고 시작한 공영방송국들의 파업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방송작가였던 나는 노조원도 노조원이지만 방송이 송출되어야 출연료와 작가료 등을 받는 비정규직들과 프리랜서 방송인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옛날에 함께 방송 일을 했던 동료들을 찾아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뜻하지 않는 방학이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노조원인 PD나 기자, 촬영 감독들은 촬영 현장이나 편집실이 아닌 방송국 로비에서 혹은 카메라 뒤가 아닌 앞에 서서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각, 촬영 현장이나 편집실은 텅 비어있을까?    


그렇지 않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업을 대비해 방송국의 비정규직들, 혹은 프리랜서 방송인들 몇몇이 그 자리에서 묵묵히 다음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 문제는 그 준비를 언제까지 해야 할지 기다림의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옛 동료들과의 통화나 만남에서 이런 나의 걱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파업에 대한 지지 성명을 내거나 노조가 운영하는 일일찻집 등에 스스로 힘을 보태며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파업을 돕고 있었다. 물론 파업이 길어지다 보니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한 달이 넘게 집에 한 푼도 가져다주지 못해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진행자도 있고, 파업 지지와 함께 퇴사를 결심한 지인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파업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 아닌 응원을 보내는 이유를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나 역시 방송을 사유화하려는 이들 때문에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는 정치권이나 특정 기업을 고발하는 아이템을 준비하고도 윗선이나 광고주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방송을 내지 못했던 일도 있었고, 사회에 영향을 미칠만한 예민한 주제를 준비할 때는 편집 과정에서 방송국 간부가 인터뷰 내용이나 프로그램 논조를 일일이 간섭하며 사전검열을 하기도 했다. 아침 정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는 이미 촬영을 마친 방송 내용을 포기하고, 하루 만에 촬영 및 편집을 마쳐 허술하기 짝이 없는 특정 행사나 인물을 앞장서서 홍보한 적도 있다.     


이렇게 누군가의 사심과 욕심, 그리고 눈치보기로 만든 방송을 시청자들 앞에 내보여야 할 때는 방송 말미에 나가는 ‘구성:김주미’라는 자막을 제발 감췄으면, 아니면 내가 아는 지인들이 부디 이 방송을 보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했다. 시청자들에게 유익한 정보와 감동을 주는 사연, 그리고 몰랐던 진실을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고된 방송 현장을 견디다가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경험할 때면 방송인이라는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났고, 내가 만든 방송에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아마도 지금 파업 현장에 있는 언론노조원들이나 파업을 지지하는 많은 방송인들이 경제적 어려움이나 가족들의 우려 속에서도 방송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부끄러운 경험들이 쌓여 그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부끄럽지 않은, 방송다운 방송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파심이 생긴다. 파업이 끝나고 난 후,  방송이 정상화되는 그 날,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 방송인들도 모두 그들이 있던 방송 현장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시간강사 시절, 방학동안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았지만 다음 학기에 강의를 맡게 됐다고, 더 많은 학생들이 나의 강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의욕이 샘솟았다. 보다 나은 수업을 만들기 위해 학기 중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하나라도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하게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았다.    


지금 파업이라는 이름의 고된 방학을 맞이한 방송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언제가 이 파업이 끝나고, 보다 자율성이 보장되고 공정한 방송을 만들 수 있는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의 이 방학을 기꺼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방송인이 되겠다던 초심을 다시 되새게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의 옛 동료들이며,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인들에게 이 방학이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되어, 방송을 향한 그들의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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