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도착한 색

1화

by 살라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울었다.


웃다가 울었다. 정확히는, 웃음이 어느 순간 울음의 온도가 되어 있었다. 눈물이 났다는 걸 뺨이 젖고 나서야 알았다.


당신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웃는 척했으니까.




당신이 말했다. 어릴 적 골목에서 친구들이랑 해질 때까지 뛰어다녔다고.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못 들은 척했다고.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들으면 들어가야 하니까.


조금 커서 사춘기가 되었을 적엔 친구들과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멋부림을 하고 다녔다고. 부모님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하고도 철이 들지 않았던, 그래도 그땐 괜찮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굵직한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나는.


나는 웃었다.


그런데 웃음이 목 어딘가에서 걸렸다.




내 어린 시절에는 골목이 없었다.


정확히는, 골목까지 나가서 놀 수가 없었다. 나는 늘 조심했다. 무엇을 조심했는지 잘 알지만 스스로 모른 척했다. 크게 웃으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오래 밖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원래 그런 사람인 척을 했다. 그러면 덜 초라했기에.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작아지는 법을 배웠다.

말을 접었다. 감정을 접었다. 나중에는 원래 접혀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당신이 물었다.


넌 재밌는 에피소드 없어?


나는 잠깐 대답을 골랐다.


없어

라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냥 없었다. 떠올리려 하면 먼저 오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자세였다. 조심하던 몸. 눈치 보던 눈. 작게 접어 두었던 말들.


7살 아이는 밤늦게 일끝내고 오시는 할머니를 기다리다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부지깽이로 맞아야 했다. 배가 고픈 늦은 저녁, 참기름 간장밥이 먹고 싶었는데 참기름을 너무 많이 넣어서 들키지 않으려고 참기름 병에 물을 채워 넣었다가 걸리고는 나무 빗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던 기억들.


그걸 에피소드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하게 슬픈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살지 않은 골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 질 녘의 그 골목 끝. 배고픔도 잊은 채 뛰던 발걸음. 들켜도 괜찮았던 얼굴.

친구들끼리 어른 흉내 내며 사고뭉치 철부지여도 뒤에 조건 없는 사랑이 있다는 안심.


나는 그 장면들 안에 살짝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내 기억이 아닌데. 내 시간이 아닌데.


당신의 이야기가 자꾸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때 알았다.


당신은 가족의 손을 오래 잡아본 사람의 온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친구들과의 웃음을 아직 몸에 남겨 둔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을 처음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눈물이 난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너무 웃겨서가 아니었다. 슬퍼서만도 아니었다.


내가 갖지 못했던 색이, 당신을 통해 처음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게. 아주 조금 늦게.


그래도 도착했다.




흑백 위에 색이 번질 때, 사람은 울기도 한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흑백화면에서 컬러화면으로 바뀌는 삶을 경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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