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마주한 나 _ 23
반복되는 하루가 있어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오늘과 다를 것 없는 내일.
몸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자꾸 뒤처지는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스며들죠.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소설의 중심 인물 빌 펄롱은 겉보기엔 남부럽지 않아요. 가정에 필수인 연료를 팔고, 딸 다섯을 키우며, 동네에서 신뢰도 얻은 성실한 사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요.
그런데 이상하죠.
안정적인데도, 평화로운데도,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행복이 없는 건 아닌데, 행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허기가 남아 있어요. “발전이 없다”는 느낌. “더 나은 삶”이 따로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성실한 삶이 어딘가에선 너무 쉽게 굳어버리는 것 같은 두려움.
펄롱은 말하자면 ‘잘 살고 있는 사람’인데, 그 ‘잘’이 정말로 맞는지 자꾸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펄롱의 마음이 흔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그는 1946년생, 아버지의 존재를 모른 채 자라다 열두 살에 어머니마저 뇌출혈로 잃습니다. 이후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보호받으며 자라요. 농장 일꾼 네드도 그에게 잘해주고요.
사람이 어떤 친절을 받으며 자라면, 마음 어딘가에 그런 문장이 남는 것 같아요.
‘세상은 완전히 차갑기만 한 곳은 아니다.’
그래서일까요. 펄롱은 결혼 후 딸 다섯을 키우는 다정한 아빠가 됩니다. 삶이 퍽퍽해도, 혹독한 계절이 와도, 아이들 뒷바라지를 묵묵히 해내요. 석탄, 도탄, 무연탄을 팔고 주문한 집까지 직접 배달합니다.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술을 즐기지 않는 건실한 개신교 신자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 성실함이, 또 그를 묶어버립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과 케이크를 만들면서도 머릿속은 내일의 일로 꽉 차 있어요. 생각은 비슷한 길로 흘러가고, 그 길은 늘 “다음 날의 노동”으로 이어집니다.
‘멈춰서 생각할 시간이 있다면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똑같을까?’
펄롱의 고민은 사실 우리 고민과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 펄롱은 수녀원에 연료를 배달하러 갑니다. 그 수녀원은 막달레나 세탁소를 겸하고 있어요. 겉으로는 평판이 좋습니다. 손수건 한 장도 깨끗하게 세탁해주니까요. 동네 사람들은 대체로 그곳을 ‘좋은 곳’으로 믿거나, 믿는 척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장소는요. 모두가 알고도 모른 척해야만 유지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펄롱은 그곳에서 이상한 장면을 봅니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하는 아이들, 문마다 채워진 자물쇠, 깨진 유리 조각이 박힌 높은 담장. 공기가 이상해요.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 아일린에게 말합니다. 수녀원에서 본 걸요.
그런데 아일린은 선을 긋습니다. “우리랑 상관없어.” 오히려 수녀들이 ‘땔감 값을 제때 준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일린이 덧붙이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이 말이 꼭 아일린만의 말처럼 들리진 않아요.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에 이 문장에 기대어 지나쳐 왔는지 자꾸 떠오르거든요.
며칠 뒤, 눈 예보가 있는 몹시 추운 날. 펄롱은 다시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갑니다. 석탄광 빗장에는 성에가 단단히 끼어 있고요. 억지로 빗장을 당겨 여는 순간—그 안에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이. 머리가 엉망으로 깎인 아이. 펄롱은 놀라서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덮어주고 밖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펄롱의 마음은 갈라지기 시작해요.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집으로 데려갈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하고 돌아설까?’
그는 결국 아이를 다시 수녀원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수녀원장은 태연하게 말하죠. “이 가엾은 애는 가끔 앞뒤분간을 못해요.” 말은 걱정하는 듯한데, 분위기는 차갑습니다. 아이는 멍하게 서 있고, 뭔가를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에요. 수녀원장과 차를 마시는 동안 아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빗긴 채 들어옵니다. 수녀원장은 묻습니다.
“왜 석탄광에 들어갔니?” 아이는 겁에 질린 채 말해요. “애들이 놀다가 저를 숨겼어요…” 그런데 그 말보다 더 선명한 건 아이의 시선과 떨림입니다. ‘그 말이 진짜일 리 없다’는 걸, 펄롱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펄롱이 아이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이름이 뭐니?”
“세라요.”
세라. 그 이름이 펄롱의 마음을 깊게 건드립니다. 세라는 펄롱의 어머니 이름과 같거든요. 세상엔 이런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남의 일이던 일이 갑자기 내 일이 되는 순간. 멀리 있던 고통이 내 기억과 닿아버리는 순간.
펄롱이 “어디서 왔니?” 하고 묻자, 수녀가 헛기침을 합니다. 더 묻지 말라는 신호. 침묵의 규칙이 작동합니다. 펄롱은 그 규칙을 느끼면서도, 떠나기 전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줘요. “나는 빌 펄롱이야.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아이를 향한 말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약속 같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걸 잊지 않겠다’는.
집으로 돌아온 펄롱은 평소처럼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냅니다. 미사를 보고, 식탁을 지키고, 일상을 이어가요. 그런데 그 ‘평소’가 그를 더 괴롭힙니다. ‘그냥 일상의 노동에 기계적으로 빠져들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남자들처럼 맥주 한두 잔 마시고 쉬고, 잠을 잘 수는 없는 건지…’ 그는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눈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합니다. 마음이 마음대로 떠돌게 두니, 잠깐 숨이 트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길로 다시 수녀원에 향해요. 혹시나… 세라가 있을까 봐. 그리고 있습니다.
펄롱은 세라의 손을 잡고 수녀원을 나옵니다. 사람들이 오가고, 시선이 꽂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어렵지만—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가슴속엔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있죠.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맞닥뜨리게 될 무언가. 그럼에도, 지금만큼은 확실합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떠올립니다. 말로, 행동으로, 혹은 ‘그냥’ 곁에 있어주던 사소한 것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결국 오늘의 펄롱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 사소함이 또 한 사람을 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늘 두려워하는 건 사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이 남기는 평생의 무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큰 사건을 요란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잔혹함을 장황하게 묘사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그래서 더 아픕니다. 말하지 않기에, 독자가 상상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펄롱을 통해 묻습니다.
침묵이 편한가, 용기가 불편한가.
모른 척함이 안전한가, 맞서는 일이 위험한가.
결말까지 다 읽고 나면 이상하게 여운이 남아요. 잔잔한데 깊고, 조용한데 오래 갑니다. 저는 그래서 이 책을 최소 두 번은 다시 읽게 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삶의 의미는 어쩌면 거창한 데 있지 않을지 모릅니다. 정말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작은 멈춤, 작은 손길, 작은 용기 같은 것들에서 시작될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