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매거진 폴인에서 이슬아 작가를 보았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라는 책으로 그녀를 처음 알았다. 처음 접한 그녀의 책을 보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녀처럼 독특하기도 쉽지 않겠다만, 솔직한 건 내게 불가능한 영역일 것이라고.
그녀는 책을 통해 가정사는 기본이요. 우리 사회가 은연중 터부시 해온 것들을 가감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낸다. 담배 피우는 여자 라든가, 누드모델을 한 경험이라던가, 부모님 없이 동생과 둘이 보낸 유년시절 따위의 것들은 지금 시대에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니다만, 환대받는 성질의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 이슬아는 개의치 않고 보여준다.
오늘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못 쓴 글도 반드시 홍보한다'라고. 그리고 받을 욕은 받고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고. 말이 쉽지. 이런 성장 과정은 용기가 8할이다. 하루가 꼬박 걸려 쓴 글을 일단 주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 자신의 글이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에서 목을 내놓고 의견을 기다린다는 건, 어느 수준의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걸까. 교만과 위선 덩어리인 나는 감히 예상도 되지 않는다.
다만, 그런 과정들이 그녀에게는 스트레칭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생계를 위해 일간 직거래의 개념으로 일간 이슬아를 만들었다는 그녀는 매일의 글들을 통해 '오늘은 이만큼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내일은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내갔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글은 담대한 용기를 바탕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 서사를 만들어 나간 것이겠지.
남을 위한 글을 쓰는 나는 그녀의 용기가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회사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보도자료를, 팩트 그대로가 아닌 팩트의 의미를 더한 홍보자료를 만드는 게 일상인 내게 나를 보여주는 용기라니. 일생의 소원이었던 책조차도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인지, 잘 읽힐지를 전전긍긍하며 펴낸 나조차도 자기 서사가 가능할까.
씁쓸한 마음의 위안으로 오랜만에 브런치를 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보다 남이 듣고 싶은 이야기로 밥벌이 한지 어언 10년 차. 가끔 어떤 것이 내 생각인지 조차도 확신 없는 지경의 나라지만. 솔직함도, 용기도 스트레칭하다 보면 내 글도 더 솔직해질 수 있으리라 위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