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라진 판결, 그러나 아무도 변호하고 듣지 않는다
변호사의 일이 AI에게 넘어간다는 건, 이제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다. 판례를 검색하고, 계약서를 분석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이미 AI가 더 잘하는 시대다. 2025년 현재, 법률 업계의 21%가 생성형 AI를 실제로 쓰고 있고, 29%는 곧 도입할 예정이다. 톰슨로이터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법률 전문가들 중에서는 이미 26%가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하고 있으며, 45%는 내년까지 도입을 계획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변호사 다음은 누구일까?
판사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릴까? '법과 양심'이라는 말은 멋지지만, 실제로는 유사한 사건, 선례, 그리고 법률 해석이라는 체계화된 데이터가 그 판단의 핵심을 이룬다. 검사의 일도 마찬가지다. 산재된 자료를 모으고, 증거의 무게를 따지며,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것.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패턴을 읽고 판단을 내리는 반복 작업이다.
모두들 그다음 내용을 예상하시겠지만. 그렇다면, 이 패턴을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한다면? 바로 AI다.
이미 Harvey는 OpenAI의 투자를 받은 법률 AI 스타트업으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복잡한 문서를 단 몇 초 만에 요약하고 핵심 쟁점을 정리해 준다. 2025년 현재, Harvey는 단순히 실험적인 기술이 아니라 전 세계 최고의 로펌들과 협업 중이다. Macfarlanes, Allen & Overy, PwC UK, 그리고 독일 텔레콤까지, 수십 개의 프리미엄 클라이언트들이 이미 Harvey를 채택했으며 변호사들의 업무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5월에는 시리즈 E 라운드에서 3억 달러를 추가로 유치하며 기업가치 5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불과 4개월 전 기업가치 30억 달러에서 급성장한 수치다.
CoCounsel은 Casetext가 개발하고 현재는 Thomson Reuters에 인수된 법률 AI 비서로, 수백만 건의 판례와 법률 문서를 기반으로 학습한 모델을 통해 사건에 가장 적절한 선례와 논리를 제시한다. 특히 사실과 다른 내용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 현상을 최소화하여 신뢰도 높은 리서치를 제공하는 것이 강점이다. 2023년 8월 인수 당시 CoCounsel은 이미 GPT-4를 기반으로 문서 검토와 법률 리서치 메모, 증인 신문 준비 등의 기능을 제공하며 법률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었다.
독일의 법원 시스템은 이미 AI를 법정에 도입하고 있다. IBM의 OLGA 시스템은 슈투트가르트 고등법원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AI 어시스턴트다. 10,000건이 넘는 밀린 사건들을 자연어 처리 기술로 분류하고 메타데이터를 추출하여 판사들이 유사한 사건들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OLGA는 법원의 문서 처리 효율성을 크게 향상했고, 사건 처리 시간을 50% 이상 줄였다. '판사를 대체한다'기보다는, 판사가 복잡한 법적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반복적인 업무를 자동화한다는 점에서 '보조'의 역할을 하고 있다.
AI는 판사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대신, AI는 판사가 실질적인 법적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 독일 슈투트가르트 고등법원 대변인 -
Adalat AI는 인도에서 시작된 스타트업으로, 법원의 재판 기록을 실시간으로 자동 작성하고 사건 흐름을 구조화하여 정리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판사가 일일이 문서를 검토하고 정리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줄여주며, 종단 간 사법 시스템(End-to-End Justice Tech Stack)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판단'이라는 행위가, 이제는 알고리즘의 계산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법정이라는 공간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이런 상상이 가능하다. 미래의 재판은 물리적인 공간도, 법복을 입은 사람도 필요 없다. 원고와 피고, 혹은 피고인과 검사 측은 각자의 AI 법률 대리인을 통해 사건 데이터를 정해진 시간까지 업로드한다. 서류, 진술서, 녹취록, 증거 사진, 감정평가서 등 모든 자료는 정해진 포맷과 구조에 따라 입력되고, 인간은 여기까지 개입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AI 판사가 작동한다. 인간의 언어는 거기서 사라진다. AI는 입력된 데이터를 수치와 벡터의 흐름으로 변환하여 처리한다. 감정도, 억울함도, 눈물도 없다. 오직 유사성 분석, 리스크 평가, 선례 매칭, 사회적 영향도 계산 같은 수학적 절차가 남는다.
그리고 단 몇 초 후, 판결이 나온다. 인간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논리와 근거, 판단 과정은 기계어로 저장된다. 말 대신 숫자와 코드가 기록을 대신한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이건 정말 '정의'일까? 아니면 단지 '처리'일까?
우리는 재판이라는 것을 단순한 판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정은 말의 공간이었다. 억울함을 풀어내는 공간이었고, 감정을 전달하고 이해받는 과정이었다. 때로는 형식적 논리보다 사람의 표정, 침묵의 길이, 떨리는 목소리가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 모든 요소는 기계에게는 무의미하다. 정확하고 일관된 판결이 나오는 대신, 우리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된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를 출력받을 뿐이다. 판결 결과에 의문이 생긴다면, 우리는 AI에게 이렇게 요청할 것이다. "판결 사유 내역서 출력해 주세요." 마치 통신요금 상세 명세서를 뽑듯 말이다. 그리고 그제야, 기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결과를 번역해 제공할 것이다. 정의가 아니라, 서비스다.
AI는 상대적으로 편견이 없다. 피곤하지도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많은 경우 인간보다 더 정확하다. 하지만 그 판단이 사회 전체에 어떤 파장을 미치는지, 그 결과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지, 법과 윤리 사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기계는 모른다.
그래서 미래의 법률가는 변호사나 판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감지자'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기계가 놓친 인간의 맥락을 감지하고, 시스템이 외면한 가치를 회복하며, 알고리즘이 오판한 정의를 재해석하는 사람. 데이터를 판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통역하는 역할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마지막 저울추를 올려놓는 건 결국 인간일 것이다. 법정에서 말할 기회를 잃은 세상에서, 우리는 말하지 못하는 정의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