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고통을 더는 사이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를 기억하는가? 꽤 오래된 영화지만, 톰 크루즈가 쇼핑몰을 지나갈 때 등장했던 광고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홍채 인식 기술이 지나가는 주인공을 스캔하고는, 허공에 뜬 홀로그램 광고판이 말을 건다. "존 앤더튼 씨, 지난번 샀던 기네스 맥주는 어땠나요? 이번엔 이 옷이랑 매치해 보세요."
개봉 당시에는 감시 사회의 공포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혔지만, 지금 다시 보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나보다 내 취향을 더 잘 아는 기술이 귀찮은 선택의 과정을 생략해 주는 세상. 어쩌면 그건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현대인이 가장 바라는 유토피아의 일면일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아침, 식탁에서 그 단서를 발견했다. 아내와 두 아들과 아침을 먹으며 첫째 녀석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엔 뭐 먹을래?"
한창 식욕이 왕성할 티네이저(Teenager)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모르겠어."
그냥 귀찮아서 한 말이 아니었다. 배달 앱을 켜면 수백 개의 가게와 수천 개의 메뉴가 쏟아진다. 별점을 비교하고, 리뷰를 읽고, 배달비를 따지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노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을 내 아들도 겪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상상해 보았다. 2030년, 가장 인기 있는 식당의 이름은 아마도 '모르겠어'가 아닐까?
이 엉뚱한 상상을 뒷받침할 기술들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단순히 주문을 대신 받아주는 키오스크 수준이 아니다. 나를 알아보고, 내 몸을 분석하고, 셰프처럼 요리하는 기술들이다.
1. 지갑도 카드도 필요 없는 얼굴, 'PopID' 미국의 스타트업 PopID는 '얼굴'을 지갑으로 만든다. 키오스크 앞에서 주섬주섬 카드를 꺼낼 필요 없이, 얼굴만 비추면 결제까지 끝난다. 이 기술이 고도화되면 식당 문을 들어서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 평소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식당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2. 내 몸을 분석해 메뉴를 설계하는, 'Open Meals' 일본의 Open Meals는 '스시 싱귤래리티'라는 프로젝트로 충격을 주었다. 고객의 타액이나 소변 등 바이오 데이터를 분석해, 부족한 영양소를 채워주는 초밥을 3D 프린터로 만들어낸다. "맛있는 거 줘"가 아니라 "지금 내 몸에 필요한 거 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3. 개인 맞춤형 영양 과학의 선두주자, 'ZOE' 영국의 ZOE는 단순한 칼로리 계산을 넘어선다. 개인의 장내 미생물, 혈당, 혈중 지방 반응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어떤 음식이 내 몸에 가장 좋은지를 알려준다. 이 기술이 식당에 적용된다면, 메뉴 선택의 기준이 '맛'에서 '과학'으로 바뀔 것이다.
4. 혈당 관리를 위한 정밀 영양 플랫폼, 'DayTwo' 이스라엘의 DayTwo는 특히 혈당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혁신적이다. 인공지능과 장내 미생물 데이터를 활용해 특정 음식을 먹었을 때의 혈당 변화를 예측하고, 개인에게 최적화된 식단을 제안한다. 당뇨 환자가 아니더라도,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5. 무엇이든 요리하는 로봇 셰프, 'Nala Robotics' 미국의 Nala Robotics가 개발한 'The Wingman'은 만능에 가깝다. 천장에 달린 로봇 팔이 튀김, 굽기, 파스타, 웍질까지 해낸다. 수천 가지 레시피를 학습할 수 있어, 점심엔 한식을 하다가 저녁엔 양식을 만드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이 기술들이 결합된 2030년의 식당, '모르겠어'에서의 저녁 시간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퇴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식당 문을 연다. 시끌벅적한 주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빗소리와 섞인 조용한 재즈 음악, 그리고 로봇 팔이 움직이는 규칙적인 기계음만 흐를 뿐이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센서들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김기준 님, 입장 확인되었습니다.’
별도의 체크인도 필요 없다. 안면 인식 센서는 내 신원을 확인하는 동시에,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 굳어버린 내 표정과 피로한 동공 상태를 읽어낸다. 스마트워치와 연동된 나의 헬스 데이터가 식당의 메인 서버로 전송된다. 오늘 하루 10시간을 앉아 있었고, 스트레스 지수가 최고치를 찍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분석된다.
빈자리에 앉자 테이블 위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떠오른다. 메뉴판은 없다. 대신 다정한, 하지만 건조한 AI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오늘 하루 많이 힘드셨군요. 늦은 저녁이라 소화 기능이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기름진 튀김보다는,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숙면을 돕는 국물 요리가 필요합니다."
화면에 '맑은 조개탕과 부드러운 순두부 덮밥' 이미지가 뜬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치킨에 맥주를 시켰을 테다. 나는 습관적으로 "맥주 한 잔 없어?"라고 물으려다 멈칫한다. AI는 이미 내가 어제 회식에서 과음했다는 걸 알고 있다.
"어제 알코올 섭취량이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오늘은 간 회복을 돕는 타우린 중심의 식단을 추천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아서 줘." 그 순간 주문이 확정된다.
투명 유리 너머 오픈 키친에서는 'Nala' 로봇 팔 두 개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쪽 팔이 웍(Wok)을 잡아 능숙하게 재료를 볶아내고, 다른 팔은 정확한 온도로 육수를 끓여낸다. 셰프의 불필요한 동선도, 감정 기복에 따른 맛의 편차도 없다.
정확히 8분 뒤. 내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상이 차려진다.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입 떠 넣는다. 간은 완벽하고, 온도는 절묘하다. 내 혀보다 내 지친 몸이 원했던 맛이다.
"뭐 먹을래?"라는 질문에 "모르겠어"라고 답해도 정답 같은 식사가 나오는 곳. 결정 장애를 앓는 현대인들에게 이곳은 천국일지도 모른다. 선택의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오직 미각의 만족과 최적화된 영양 섭취만 남으니까.
식당 문을 나서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한 손으로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오는데, 문득 입안이 씁쓸해졌다.
우리의 취향이라는 것은 수많은 '실패한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맛없는 식당에서 투덜거려보기도 하고, 메뉴 선택에 실패해 남기기도 하고, 그러다 우연히 시킨 낯선 메뉴에 감탄하는 그 비효율적인 과정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과연 '나만의 취향'을 가질 수 있을까?
오늘 내가 먹은 것은 따뜻한 저녁밥이었을까, 아니면 최적화된 데이터였을까.
빗물에 반사된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음번엔 맛이 좀 없더라도, 낡은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며 기어이 '실패할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