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이 고른 옷을 입고, 취향 있다는 말을 듣는 시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는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급이 정해지고, 자라면서 수면 학습을 통해 취향이 주입된다. 어떤 계급은 책을 혐오하도록, 어떤 계급은 특정 스포츠에 열광하도록. 취향이란 살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시스템에 최적화된 방향으로 설계되는 세계다.
1932년에 쓰인 소설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이 장면이 떠오른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갑자기 취향을 잃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취향은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 조용히 위임되었다.
음악은 플레이리스트가 고른다. 음식은 앱이 "당신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추천한다. 옷은 AI 에이전트가 박스로 보내준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람은 점점 선택하는 주체에서 승인하는 객체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승인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인다.
2023년 설립된 패션 AI 스타트업 Daydream은 이 흐름의 최전선에 있다. "Saltburn 느낌의 파리 웨딩 복수 드레스"처럼 자연어로 입력하면, AI가 취향을 파악해 8,000개 브랜드에서 큐레이션해준다. Google Ventures와 Forerunner Ventures로부터 시드 $50M을 조달했고, 사용할수록 플랫폼이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구조다. 문제는 — 그 과정에서 내가 나를 점점 덜 알게 된다는 것이다.
Perplexity는 한 발 더 나아간다. 2024년 11월 출시한 "Buy with Pro"는 검색과 구매를 한 번에 처리하는 쇼핑 에이전트다. "칫솔 사줘" 한 마디면 알아서 비교하고 결제까지 완료한다. 출시 후 쇼핑 관련 쿼리가 5배 급증했다는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위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편에서 다뤘던 Machine Customer의 세계가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다. 이제 AI는 단순히 추천하는 게 아니라, 직접 구매한다. 소비재 회사 입장에서는 진짜 고객이 사람인지 AI인지 불분명해지기 시작한 전환점이다.
AI는 감성 카피에 흔들리지 않는다. 광고 모델의 얼굴에 반응하지 않고, 패키지의 감성적인 곡선을 예쁘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대신 재구매율, 클레임 가능성, 가격 대비 성능을 본다. 소비재 회사가 100년간 갈고닦은 무기 — 브랜드 스토리, 감성 마케팅, 패키지 디자인 — 가 AI 앞에서 조용히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이스라엘 스타트업 Tastewise는 이 역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017년 설립된 이 회사는 750억 개 소셜 미디어 포스트와 1조 개 레시피 데이터를 분석해 Kraft Heinz, Mars, PepsiCo 같은 대기업에 "소비자가 다음에 원할 것"을 알려준다. 2025년 Series B로 $50M을 추가 조달해 누적 $72M에 이른다. 소비자의 취향을 예측하던 회사들이, 이제 취향 예측 AI를 사는 회사가 되고 있다. 취향의 공급망이 통째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밖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내 스웨터를 보며 말했다.
"패턴이 너무 예뻐요. 옷 고르는 센스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어디서 사셨어요?"
당혹스러웠다. 내가 고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휴머노이드가 꺼내놓은 걸 그냥 입고 나왔고, 패턴이 있다는 것도 그 순간 처음 알았다.
집에 돌아와 옷장을 열었다. 정리된 옷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언제 샀는지 모르는 것들, 내가 고른 기억이 없는 것들. 색깔도, 소재도, 패턴도 — 누군가의 취향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이게 다 내 옷이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옷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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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웨터를 만든 회사는 어떻게 그 옷을 내 옷장에 넣었을까.
같은 해 2월, 한 의류 브랜드의 SS 시즌 기획 회의. 테이블 위에는 트렌드 리포트도, 무드보드도 없다. 화면에는 숫자만 있다. 주요 AI 쇼핑 플랫폼들이 공동 운영하는 취향 경매 플랫폼 — "Taste Allocation Q2" — 의 입찰 현황이다.
"이번 분기 30-40대 여성 세그먼트, 내추럴 텍스처 카테고리 낙찰가가 지난 시즌보다 23% 올랐어요."
기획팀장이 말한다. "우리가 여기 들어가려면 최소 얼마를 써야 하죠?"
아무도 "요즘 소비자들이 뭔 좋아할 것 같냐"라고 묻지 않는다. 소비자가 뭔 좋아하는지는 AI가 안다. 아니, AI가 결정한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그 카테고리 안에서 낙찰받을 만한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
회의가 끝난 뒤, 한 신입 디자이너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우리가 만드는 옷, 누가 좋아하는 건가요? 사람인가요, AI인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비재 회사의 역할은 결국 갈라질 것이다. 알고리즘이 선택하기 쉬운 제품을 만드는 회사 — 안정성과 일관성, 예측 가능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 와, 반대로 일부러 설명이 필요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 후자는 소수에게 더 강렬하게 팔릴 것이다. AI가 아닌, 사람에게 직접 선택받기 위해 존재하는 브랜드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의 취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큰 손주가 성적표를 들고 왔다. 성적이 잘 나왔다며, 특히 A+ 받은 과목이 있다며 신나서 떠들었다.
같이 기뻐했다. 잘했다고,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성적표를 건네받아 살펴봤다.
A+. 취향 —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고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과목.
손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도 웃었다. 잘했다고, 한 번 더 말했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에, 성적표를 돌려주는 손이 조금 느렸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취향을 다시 배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