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B 협상 테이블의 AI는 소주 없이, 골프 없이 계약을 따낸다
2025년 개봉한 영화 〈소주전쟁〉.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자금난에 빠진 ‘국보소주’를 둘러싼 이야기다. 글로벌 투자사 직원 인범(이제훈)의 목적은 명확했다. 위기에 처한 회사를 헐값에 인수해 비싸게 되파는 것. 그는 이 본질을 철저히 숨긴 채 “회사를 살려보겠다”며 접근하고, 재무이사 종록(유해진)과 밤낮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뢰를 쌓는다.
종록은 그 술잔의 온기를 신뢰의 증거로 믿었고, 결국 회사의 치명적인 속살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었다. 인범은 그저 자신의 목표에 충실했을 뿐이다. 문제는 종록이 함께 나눈 시간과 술잔을 ‘데이터’가 아닌 ‘감정’으로 오독했다는 데 있었다.
투자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비슷한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여러 VC가 동시에 텀싯(Term Sheet)을 제시할 때, 창업자가 반드시 조건이 가장 좋은 곳을 택하진 않는다. 오히려 가장 많이 발품을 팔고, 고민을 깊게 나누고, 새벽녘 문자 한 통에도 진심을 담아 답해준 담당자를 선택하곤 한다.
비즈니스에서 관계란 결국 감정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이기 때문이다. 숫자가 비슷하다면, 누가 더 긴 호흡으로 내 리스크를 나눠 짊어질 것인가가 본질적인 기준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서늘한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그 파트너가 인간이 아니라 AI라면 어떻게 될까?”
변화는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시작됐다. 아마존의 ‘Smart Reorders’ 기능을 보자. 프린터 잉크가 떨어질 때쯤 알고리즘이 스스로 주문을 마친다. 소비자가 브랜드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순간’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다. 영업사원이 끼어들 틈은 없다. 이제 영업의 대상은 고객이 아니라 알고리즘이다.
이 파도는 이미 B2B 협상 테이블까지 덮쳤다. 월마트는 수만 개의 공급업체를 관리하기 위해 Pactum AI를 도입했다. AI 챗봇이 공급업체와 직접 결제 조건, 배송 기간, 단가를 협상한다. 놀라운 것은 결과다. 공급업체의 75%가 사람 바이어보다 AI와 협상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AI는 공정하고, 빠르며, 무엇보다 인간 특유의 ‘감정적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에서 감정의 배제가 오히려 신뢰를 높이는 역설이 시작됐다. 런던의 스타트업 Procure AI는 아예 소싱부터 계약까지 전 과정을 자율 에이전트에게 맡긴다. 가트너는 3년 내 B2B 구매의 90%를 AI가 처리할 것이라 전망한다. 15조 달러 규모의 거대한 시장이 ‘데이터의 전장’으로 바뀌고 있다.
만약 영화 〈소주전쟁〉의 종록 옆에 AI 에이전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인범이 소주잔을 건네기도 전에 에이전트는 이런 리포트를 띄웠을 것이다.
“유사 인수 사례 분석 결과, 해당 투자자의 18개월 내 재매각 확률 89%. 제안 기업가치는 시장가 대비 31% 저평가됨. 계약 전 독립 실사 권장.”
이 리포트를 본 종록이 인범과 밤새 술을 마셨을 리 만무하다. 조금 더 미래를 상상해 보자. 2032년의 어느 구매팀장은 출근하자마자 대시보드를 연다. 밤새 AI 에이전트들이 17개 공급사와 가격 협상을 끝내놓았다. 반대편 영업사원은 자고 일어났더니 계약이 성사된 로그를 확인한다.
하지만 그는 기쁨보다 묘한 정체성의 위기를 느낀다. “모든 것이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결정되는 세상에서, 인간 영업사원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VC 세계라고 예외일 순 없다. 스타트업이 투자사를 고를 때, 담당자의 친절함이나 새벽 문자 답장 횟수 대신 ‘투자사의 포트폴리오 생존율’, ‘후속 투자 집행 속도’, ‘계약 조건의 투명성’이 AI에 의해 실시간으로 점수화될 것이다. 관계의 ‘온도’가 아니라 데이터로 증명되는 관계의 ‘실적’이 신뢰의 척도가 되는 시대다.
우리는 무엇으로 신뢰를 증명할 것인가. 여전히 술잔인가, 아니면 압도적인 데이터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은 남는다. 바로 ‘진짜 리스크 공유(Skin in the game)’다. 알고리즘은 손실을 계산할 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실패의 두려움을 안고도 함께 베팅한다. 소주를 마시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계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책임의 무게’를 나누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터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대, 당신의 ‘진심’은 어떤 데이터로 증명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