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不動) 없는 부동산 세상

콘크리트 점유에서 공간 종량제 세상을 꿈꾸며

by 미래관찰자

영화 <제5원소>의 주인공 코벤 달라스의 아파트는 23세기의 주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버튼 하나에 벽에서 침대가 나오고, 좁은 통로가 샤워실로 변하는 그 기괴하면서도 효율적인 공간 말이다. 1997년에 개봉한 이 영화가 상상한 미래는 '좁은 공간의 집약적 활용'이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20세기식 '콘크리트 박스'에 갇혀 있다. 최근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 일몰을 앞두고 시장이 들썩이는 풍경을 보라. 우리는 여전히 집을 '사는(Living) 곳' 이전에 '사는(Buying) 것'으로 취급하며, 정형화된 콘크리트 구조물 단위로 수억 원의 값을 매기고 세금을 계산한다. 기술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왜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Real Estate)' 덩어리에 저당 잡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집은 왜 거실, 주방, 화장실, 방이 하나로 묶인 '풀 패키지'로만 존재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는 왜 사용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 전체 면적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까? 이 질문 끝에 나는 '공간의 해체'라는 상상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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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하드웨어를 재정의하는 기술들


이런 상상을 뒷받침할 만한 하드웨어 기술들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이들은 주거를 '고정된 물건'이 아닌 '가변적인 서비스'로 전환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Ori Living: 로보틱 가구를 통한 공간의 연금술 MIT 미디어랩에서 스핀오프한 오리 리빙은 '움직이는 벽'을 만든다. 버튼 하나로 물리적 벽체 자체가 레일을 타고 이동하며 거실을 서재로, 혹은 대형 드레스룸으로 즉각 재설계한다. 10평의 공간에서도 30평의 기능성을 누릴 수 있게 하며, '평수'라는 물리적 제약을 '시간'이라는 변수로 해결하는 주거 운영 체제의 시초라 할 만하다.


Bumblebee Spaces: 천장을 활용한 3차원 공간 제어 범블비 스페이스는 천장을 제2의 바닥으로 활용한다. AI와 로보틱 리프트를 결합해 평소에는 천장 속에 침대나 책상을 수납해 두었다가, 사용자가 호출할 때만 내려보낸다. 바닥 면적을 점유하지 않고 공간을 '필요할 때만 호출'하는 이들의 방식은 주거의 수직적 확장을 가능케 한다.


MIT Media Lab - City Science Group: 건축적 로보틱스 이들은 가구의 이동을 넘어 조명, 사운드, 물리적 벽체까지 거주자의 활동에 반응하는 환경을 연구한다. 요리할 때는 주방이 확장되고, 운동할 때는 거실이 넓어지는 식이다. 집을 하나의 거대한 지능형 디바이스로 정의하며, 물리적 공간이 인간의 의도에 따라 액체처럼 흐르는 미래를 예견한다.


Koda by Kodasema: 특정 좌표를 벗어난 이동형 주거 에스토니아의 코다는 집 전체를 하나의 독립된 모듈로 제작해 어디로든 옮길 수 있는 프리팹(Prefab) 주택을 만든다. 특정 토지에 종속되지 않는 이들의 접근은 부동산의 '부동성(Immobility)'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는 미래에 방 단위 모듈이 건물 내부에서 자유롭게 결합하고 분리되는 하드웨어적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공간의 언번들링(Unbundling): 구독을 넘어 종량제로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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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술들이 성숙해진 미래를 가정해 본다면, 주거는 콘크리트 묶음 상품을 해체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쓰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상상하는 집은 크게 세 가지 레이어로 분리된다.


1) 개인 스토리지 레이어: 내 옷과 책, 소중한 물건이 담긴 최소한의 물리적 영토다. 24시간 내가 '소유'하며 관리비를 지불하는 유일한 고정 영역일 것이다.

2) 공용 코어 레이어: 주방과 욕실 등 인프라가 집중된 영역이다. 필요할 때만 접근 권한을 얻어 사용하는 공유 자원이 된다.

3) 가변 공간 모듈: 침실, 서재, 거실 등이다. 이것이 바로 '공간 종량제'의 핵심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데이터나 전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공간도 '내가 점유한 면적 × 시간'만큼만 지불하는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는 오직 '수면 모듈'만큼의 부피만 점유하고, 낮 동안 집을 비우면 내 모듈이 압축되거나 건물의 휴면 구역으로 이동하는 식이다. 내가 쓰지 않는 시간의 공간은 다른 사람의 서재가 되거나 운동 공간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에너지 효율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생길 것이다. 사용자가 쓰지 않는 공간은 시스템에 반납되어 '딥 슬립(Deep Sleep)' 모드로 들어간다. 비워진 구역은 물리적으로 폐쇄되거나 최소 유지 상태로 전환되어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사는 짐을 싸는 고역이 아니라, 시스템상에서 내 공간의 '상태'를 변경하는 로그 데이터가 되는 셈이다.



소유의 종말, 혹은 거주 정의의 새로운 시작


공간의 종량제화는 단순히 '주거비 절감'을 위한 아이디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수천 년간 유지해 온 '땅과 결합한 소유권'이라는 고정관념이 흔들리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기회비용을 콘크리트 벽 안에 가둬두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독립해 비어버린 방, 온 가족이 출근하고 텅 빈 거실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노동에 저당 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공간을 점유가 아닌 '흐름'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부동산이라는 묵직한 굴레에서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이런 상상 끝엔 늘 서늘한 질문이 따라붙는다. 내가 없는 사이 타인이 스쳐 간 공간에서 우리는 여전히 집이라는 안온함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도 미래의 '집'은 벽돌로 쌓은 성채가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든 나를 따라오는 '취향의 데이터'와 '개인 스토리지'의 결합체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집은 이제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순간 나를 감싸주는 서비스 그 자체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래의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묻게 될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오늘 몇 평의 시간을 살았나요? 그리고 그 시간은 당신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채웠나요?"

우리가 끝내 소유하고자 했던 것은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그 안에서 보낸 밀도 있는 시간이었음을 이 공간의 해체라는 상상을 통해 다시금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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