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망했다

미루는 게 뭐 대수라고

by 이준

'망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내 머릿속은 ‘망했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내 계획은 완벽했는데. 제때 끝낼 수 있었는데. 계획을 따르기만 했다면.


내게는 고질적인 병이 있다. 병리학적 ‘질병’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20년도 넘게 싸워 오고 있는 만성 질환에 가깝다. ‘Procrastination’. 대개 단순히 ‘미루기’라고 옮기지만, 해외에서는 ‘putting off’나 ‘delaying’이라고 표현하는 대신 읽기에도 번거로운 긴 단어를 붙여 가며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는 대상이다. 국내 학계에서는 ‘지연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미루기는 하려 했던 일을 꾸물거리며 하지 않는 상태 혹은 결정을 말한다. 가령 오늘 저녁에 과제 초고를 작성하기로 마음먹었음에도 다른 불필요한 일을 하느라 하지 않았다면 이는 미루기다. 당연한 소리처럼 들릴 테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하려 했던 일이 존재했으며, 이를 수행하는 대신 불필요한 일을 했다는 점이다.


Photo by Pedro da Silva on Unsplash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정도 미루며 산다. 직장인이라면 당장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담감에 워드나 엑셀을 여는 대신 괜히 이메일부터 접속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내 경험이다). 학생이라면 마감 기한이 더 이른 10장짜리 에세이 대신 제출까지 더 여유 있지만 1장으로 끝낼 수 있는 비교적 쉬운 과제를 먼저 해치우기로 선택하거나, 겨우 마음 먹고 앉은 책상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아 느닷없이 대청소를 하느라 정작 그날은 한 글자도 쓰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역시 내 경험이다).

일상에서도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우리는 미룬다. 연인과 대화를 통해 함께 결정해야 할 사안이 있지만 부담스러운 마음에 '다음에 하지, 뭐'라며 말을 꺼내지 않기도 하고, 약속 시간에 도착하려면 가령 3시에는 출발해야 하지만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다가 2시 40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시작하기도 한다. 설거지도 미루고 빨래도 미룬다. 다 마른빨래 개는 일은 왜 그렇게 귀찮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procrastinator(지연행동가)’라고 불리는 미루는 사람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단순히 넘길 수 없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미루기 사례를 몇 가지 들어 보자.


(사례 1) 대학생 A는 학기 초, 에세이 과제를 받았고 총 16주를 기준으로 조사, 초고 작성, 교정 계획을 세웠다. 한 달 후, A는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 두 달 후, ‘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으니 슬슬 시작해야 하는데.’라며 불안한 마음을 안고 매일 잠에 든다. 세 달 후, 과제 제출까지 한 달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조사를 시작하지만, 마음만 급하고 진척은 없다. 마감 일주일 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A는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마감 하루 전, 겨우 완성한 초고를 헐레벌떡 교정한다. 마감 1분 전, 교수에게 제출한다.
(사례 2) 프리랜서 B는 매년 5월이 되면 종합소득세를 신고해야 한다. 과거와 달리 신고 절차가 비교적 단순해진 덕분에 1시간만 들이면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B는 오는 주말에 신고를 마치겠다며 일단 미룬다. 일주일이 지나고, B는 ‘주말에는 좀 쉬어야지’라는 생각에 세금 신고를 다음 주로 미룬다. 다음 주가 되고, 일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B는 다시 다음 주말로 미룬다. 같은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된다. 6월이 되고서야 B는 세금 신고 기간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루기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해야 할 일이나 하려 했던 일을 계획한 시간에 수행하지 않고 연기하는 행위이다. 만성적이고 심각한 미루기 습관의 결과는 다 마른 지 일주일이 되도록 방치되고 있는 세탁물과 같은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들이, 우리가 미루는 일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다. 만성적으로 미루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결과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 계획 하나는 끝장나게 세운다. 문제는 그 완벽한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연 습관은 자신에게, 주변 사람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학생 A는 낮은 에세이 성적을 받을 확률이, 프리랜서 B는 연체로 인한 가산세를 납부할 확률이 높다. 이는 비단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A가 장학생이었다면(A는 미루는 습관 때문에 지속적으로 과제를 미뤄 왔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장학금을 받았을 가능성은 낮지만, 논의를 위해 가정해 보자면) 다음 학기에는 장학금을 놓칠 공산이 크다. B 역시(마찬가지로 논의를 위해 가정하자면) 부담스러운 수준의 가산제가 부과되어 주변인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루기가 현실적인 문제로 발전하여 돌아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내면의 문제이다.


(cover image by Brett Jord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