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는 사람은 어떻게 자기혐오에 빠지는가
위키피디아의 '지연활동' 페이지를 보면 미루기는 대체로 아래의 사고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쳐 진행된다고 한다.*
1. 초기에는 희망적
2. 초기에 미룸으로써 약간의 희망이 있지만 계획대로 하지 않음에 따른 불안감, 시작에 대한 압박감 발생
3. 여전히 시작을 못하는 경우 후회감, 미래에 대한 걱정・불안 생김
4. '아직 시간이 있다'라고 희망을 놓지 않음. 그러나 죄책감, 수치심이 있음
5. 자신에게 자기 통제력, 용기, 행운 등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됨
6. 과제를 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고민・선택
7. 과제를 실행하든 포기하든, 다음 번 과제는 미리미리 잘할 것이라고 생각
그리고 아마 '이 과정을 통해 완수한 과업의 결과물은 수준이 낮을 확률이 높음'을 마지막 8번 단계이자 결과로 덧붙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위의 미루는 사고 과정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보인다. 하나는 압박감, 불안, 후회, 걱정, 죄책감, 수치심, 포기 등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단계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미루기 습관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무의식적으로 내린 미루기 결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설거지 하룻밤 미룬다고 해서 어떤 큰일이 발생하겠는가. 그저 아침에 지저분한 싱크대를 바라보며 '어휴, 저걸 언제 다 해. 어제저녁에 해둘 걸.'이라며 자책할 뿐이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자책. 자기 비난이 시작되고 감정적 괴로움이 발생하는 순간부터 미루기는 문제가 된다.
두 번째는 일곱 번째 단계의 자기반성과 미래의 내 태도에 대한 다짐이다. 이 부분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대개 이 다짐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루는 습관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사이클을 어렵지 않게 벗어날 수도 있다. 일을 미루며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동기 부여 요인이 되어 되려 긍정적으로 작용해 실제로 다음에는 계획을 잘 지키며 만족스러운 성과를 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미루기로 인해 부정적 감정의 악순환에 빠져 버린 사람이라면 짐작건대 열에 아홉은 아마 이 사이클을 벗어나기 어려워할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반복적으로"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곧잘 미루곤 했다. 시작은 시험공부였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내내 모든 시험을 소위 말하는 벼락치기로 공부했다. 중학생 때에는 학원에서 예습하는 영어, 수학, 과학, 사회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영역을 전날 밤 맥심 커피를 잔뜩 타 놓고 교과서를 훑는 것으로 공부를 마쳤고,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고등학생 때에는 거의 전 과목을 그렇게 공부했다. 물론 고등학교 수학과 과학은 벼락치기로 시험을 대비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과학을 좋아했고 수업 시간에 충실히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수학은 이과생임에도 불구하고 모의고사에서 '수리 나형'을 택해야 하는 수준이었고, 성적도 겨우 반타작에 그쳤다.
이렇게 학업 영역에서 시작된 미루기 습관은 성인이 되며 점차 그 외 영역으로 퍼졌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미루기 시작했다. 앞선 글에서 약속 시간 20분 전이 돼서야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도, 무거워질 분위기가 싫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연인과의 대화를 회피하고 미룬다는 이야기도 모두 나의 사례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고, 프리랜서로서 일을 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미루기 수준은 점진적으로 한 단계씩 레벨업 했고, 지금 나는 미루는 습관이 만든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미루는 모든 일에 마감이 있는 건 아니다. 공부나 직업과 관련된 일 등에는 보통 언제까지 끝내야 한다는 기한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취미를 찾거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등 기한이 없는 일도 있다.
미루는 정도가 심각해지면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자기혐오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기한이 있는 일을 미루며 발생하는 단순한 불안함에서 시작한다. 조금씩 미루다가 마감이 임박한 시점이 돼서야 헐레벌떡 일을 처리하니 결과물이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다음에는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겠어. 계획이 문제였던 것 같아. 너무 자신에게 여유를 줬어. 매일의 분량을 더 세세하게 세팅해서 하루라도 미룰 수 없도록 계획을 수정하자.'
다시 비슷한 상황이 여러 차례 찾아오지만 아무리 계획을 수정해도 미루는 건 변함이 없다. 시간 안에 맞추지 못하리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이를 기점으로 시작된 부정적 감정은 이내 자신에 대한 실망, 한심함으로 발전한다. '남들은 시간 맞춰 잘하는 것 같은데, 나는 대체 왜 이럴까.' '나는 의지도 박약하고, 시간 관리 능력도 부족해.' '정말 한심하다...' '나는 실패자야.'
이러한 감정이 내적으로 반복되다 보면 정신적 에너지 준위가 낮아지고, 이내 우울감으로 심화한다. 우울함은 무기력함으로 발전하고, 마음이 탈진했을 때 가장 손쉽게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은 자신이다.
마음이 지치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떨어지면 신체적 에너지 준위도 함께 낮아진다. [미루기 → 낮은 결과물의 질 → 자기 비난]의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욕도 떨어진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이제 기한이 없는 일까지 미루기 시작한다. 부모님께 전화드리기, 새로운 취미 찾기, 책 읽기, 하다못해 아침에 일어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조차 5분, 10분, 1시간씩 미룬다. 자기 효능감은 사라진 지 오래, 우울감과 자기 혐오감만 깊어져 간다. 나처럼 쓸모없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없어도 그만인 것을.
너무 극적으로 과장하는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그저 하나의 습관에 불과한 미루는 패턴이 스스로의 존재에 회의를 느끼게 만들 정도의 감정 상태로 이끌 수 있는가. 하지만 이 모든 과정과 감정은 내가 겪은 것이고 겪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정말 내 의지의 문제일까? 책임감, 시간관리 능력, 게으른 성향의 문제일까?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어 왔다. 하지만 미루기(지연행동)에 관한 여러 연구 결과를 접하면서 단순히 내 성향만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over photo by Gadiel Lazcano on Unsplash)
*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C%97%B0%ED%96%89%EB%8F%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