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공간이 역사의 현장으로 인정받은 근대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미래의 중요 문화재로 남게 될 등록문화재를 찾아 근대의 시간 속으로 산책하며 글을 쓴다 >
우리의 근대 문화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많이 배어 있다. 서양 문화가 우리 문화와 만나면서 우리 근대문화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 기독교 교회 건축물인 예배당은 근대건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등록문화재 중에도 교회 건축물이 60여 개가 지정될 정도로 비중이 높으며 계속 더 많이 지정될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는 지금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기독교 교회 건축물들이 미래의 주요 지정문화재가 될 것이다.
칠곡군 왜관읍
대구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보고 싶은 곳은 칠곡 왜관성당이었다. 왜관성당은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던 독일인 신부 ‘알빈 슈미트(1904~1978)’가 설계한 성당이다. 당시의 성당 건축은 대부분 양식주의 형태로 건립되었다. 이와 달리 왜관성당은 내·외부 공간을 보다 자유롭게 구성한 것 등이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아 한국 교회 건축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관이란 지명이 지금껏 남아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칠곡이나 왜관이란 지명은 고속도로 상에서 칠곡휴게소와 교통표지판의 왜관 IC 방향 표시를 본 게 다였는데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왜관(倭館)은 조선 시대에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만든 곳이다. 관사와 숙소, 교역장 등을 지어 일본인들이 머무르는 집단 거주지이며 이곳을 관할하는 관청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 초 왜구의 피해가 심해져 태조와 태종이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 뒤 무분별한 왜인의 왕래를 통제하기 위해 태종이 부산포(부산), 제포(창원), 염포(울산), 가배량(고성군)을 개항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에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개항장은 폐쇄되었다가 대마도 도주의 간청으로 부산포, 제포, 염포의 삼포를 다시 개항하여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 접대 등에 관한 행정을 맡아보게 하였다. 왜관은 외교 관계의 변천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내륙으로 수로를 이용하는 일본인을 위하여 중간 숙소인 소규모 왜관을 10여 개를 설치하였으나 현재는 기록만 남아 있는데 낙동강 유역의 칠곡군에는 '왜관'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군의 왜관은 현 왜관읍의 낙동강 맞은 편인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다. ,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의 왜관역이 현 왜관읍 지역에 설치되면서 이 지역의 행정구역명이 왜관면이 되었고 1949년에 왜관읍으로 승격하였다. 원래 왜관이 있던 곳은 구왜관읍으로 불린다.
칠곡군 왜관읍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천주교가 전파된 본거지로 교육, 문화 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왜관읍에는 왜관성당, 가실성당,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등이 있고 인근에 신나무골 성지가 있어 천주교의 뿌리깊은 전통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에는 이 지역이 낙동강 전투의 최대 격전지가 되어 미군 제1기병사단이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북한군 제3사단을 궤멸시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곳이기도 하다.
칠곡 왜관성당
여행 떠나기 전 자료 검색을 통해 본 왜관성당의 사진은 그간 보아 왔던 가톨릭 성당의 전통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검색을 통해 본 건물 사진은 새로 지어진 현대 건축물로 보였다. 이 사진들은 근래에 지은 새 성당이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성당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왜관성당은 사진에서 보았던 그 건물이었다.
왜관성당 360도 사진 보기 - 클릭 후 화면에 손가락이나 마우스를 대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360도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찾아보았던 오래된 가톨릭 성당 중 횡성 풍수원성당, 전주 전동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홍천성당 등은 전통적인 고딕양식을 기반으로 한 하늘을 향한 높은 첨탑을 가진 건축물이었다. 대체로 큰길에서 벗어난 작은 언덕에 세워져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며 단아하면서도 장엄한 이국적인 감흥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이 땅에 세워진 초기의 가톨릭 성당들이나 이후의 성당들이 대체로 이런 전통적 양식을 이어받았으나 왜관성당은 지어진 위치도 대로변에 세워져 가톨릭 성당으로서는 다소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겉모습으로 보았을 때 불과 몇 년 전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 같았다. 웅장하고 권위적인 성당이라기보다는 이웃 동네의 교회처럼 교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위기가 한결 정겨웠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보이는 친근한 건물이기도 하였다. 왜관성당은 1928년 가실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지금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왜관읍 관문로 61) 자리에서 1956년 말까지 구미와 성주, 군위지역까지 선교를 담당한 9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깊은 성당이다.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왜관 지역에 유치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이곳의 교육여건 조성에도 힘을 기울여 왜관의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 1967년 현재 장소(왜관읍 관문로 25)에 지금의 성전을 봉헌하였으며 왜관 지역 선교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왜관성당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회 소속이었던 독일인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1927~1978) 신부가 설계하여 1966년 건축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성당이 전통적인 양식주의 형태로 지어진 것과 달리 왜관성당은 근대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2층 건물로 그 당시로는 드물게 2층에 성당을 두었다. 그래서 고딕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의 가톨릭 성당 모습에 익숙하였던 눈에 이런 근대적 모습의 성당을 처음 보았을 때 낯선 모습으로 다가왔던가 보다.
이 성당은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1층에 있는 여느 성당과 달리 2층에 예배당이 있다. 마당에서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앞쪽에는 종탑 모양의 탑 윗부분에 십자가가 있었다. 이 탑과 출입문 사이에 연결된 공간이 계단과 연결되면서 휴게 공간을 이룬다.
성당 마당에서 성당과 주변 시설물 등을 살펴본 후 내부를 보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현대식 외관과 함께 다른 성당에 비해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예배당 내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성당이나 개신교 교회를 방문하면 늘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내부도 보면서 잠깐 기도를 드리고 나왔다. 그러나 이날 코로나 때문에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이날은 내부를 보지 못해 성당 내부에 관한 내용은 문화재청의 자료 사진과 왜관성당의 홈페이지에 기재된 성당 설명을 참고로 하여 쓸 수밖에 없었다. 성당 내부는 타원형의 평면 공간에 제단부와 현관부를 덧붙인 형태이다. 전통적인 교회 건축의 내부 구조는 제단에서 출입문까지 긴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관성당은 이 틀을 깨고 회중석을 가로로 더 넓게 지었다. 이것은 전례 기능에 따른 공간 배열을 최우선시한 것이다.
본 저작물은 '문화재청'에서 '2018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4유형으로 개방한 '칠곡 왜관성당2.jpg(작성자:문화재청)'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좌석이 부채꼴 형태를 이루어 어느 자리에서나 제단부를 볼 수 있어 예배에 집중할 수 있다. '전례의 공동체성'을 강조하여 교인들이 전례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독특하게 감실을 제단과 분리해 설치한 것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외관 형태보다 전례 기능에 따른 공간 배열을 우선시한 점, 내. 외부 공간을 더욱 자유롭게 구성한 점 등으로 볼 때 근대형의 교회 건축물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건물과 함께 알빈 슈미트 신부가 그린 벽화와 설계도면이 남아 있다는 점이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에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자료를 통해 본 예배당의 위치와 내부 구조 역시 기존의 성당들과 다른 모습이었다. 기존의 성당들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전통적인 바실리카식 내부구조로 되어 있다. 바실리카식은 건축양식이라기보다 건물의 용도를 일컫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에서 발전시킨 건축형태로서 기원전 2세기 로마의 대규모 공공건물을 의미하였다.
왜관성당 부속건물에 걸린 2019년 성탄밤 미사 기념 사진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장방형의 건물에 3~5개의 기둥을 열 지어 세우고 지붕을 씌워 실내공간이 넓다. 이러한 형태의 건물을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초기 교회의 건축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그래서 일반적인 성당 건축물 내부 구조는 제대에서 교인들이 앉는 회중석까지의 거리가 세로로 길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왜관성당은 회중석 배열을 제대와의 길이보다 가로폭을 더 넓게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당 내부의 제단 뒤쪽의 벽에는 알빈 신부가 그린 벽화가 있는 것도 특이하다. 얼핏 보면 추상화 같기도 한 현대 회화를 제단 뒤의 벽화는 처음이었는데 실물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왜관성당 홈페이지에 이 성당 벽화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도시=불규칙한 무늬)은 길고 보이지 않는 혼돈 그것이다. 이 혼미한 우리 삶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빛(흰색)으로 세상을 밝히고 참된 길, 즉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빛이요, 희망이며, 우리의 행복임을 보여주고 있다. “
왜관성당 360도 사진 영상
교회 건축가 알빈 슈미트 신부
2층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당에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 계단 옆에 한 인물의 부조상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눈에 띄었다. 그 비석 아래쪽에 큰 글씨로 '알빈 신부 기념비'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 비문 위쪽에는 알빈 신부의 부조상과 함께 '교회 건축가 알빈 슈미트 신부'라고 새겨져 있었다. 알빈 신부가 어떤 분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비문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한 외국인 신부님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문을 읽으며 알게 된 알빈 신부는 1904년생의 독일인 신부였다. 1936년 사제품을 받은 뒤 1937년 만주 연길교구로 파견되어 그 지역에서 한국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광복 전까지 북만주 일대에 돈화성당, 명월구성당, 연길성당을 설계하였다. 일제의 패망 후에는 중국 공산군에 체포되어 1949년 독일로 추방되었다.
독일의 한 김나지움의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 재건과 근대건축 운동의 흐름을 목격하여 전문적인 교회 건축가로 변신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1958년 독일에서 한국의 김천 평화동 성당을 설계한 것을 계기로 1961년 왜관수도원으로 다시 파견되어 한국 가톨릭 건축의 새 역사를 열게 된다. 알빈 신부가 1966년에 지은 왜관 성당은 그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진다. 일반 본당으로는 유일하게 2층에 성당을 두었고 부채꼴 모양의 좌석은 신자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고무하며 1층에는 개방형 친교 공간을 배치하였다. 이후 복합적 교회 건축물의 전형이 되었다. 그의 교회 건축은 주변 분위기를 압도하지 않고 열린 신자 공동체를 지향하며 구조와 재료를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의 특징은 기능성과 거룩함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 건축에 근대주의를 도입한 선구자로 꼽힌다. 비문에 의하면 그는 1958년부터 20년간 185개의 가톨릭 건축물을 설계하여 세계 건축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큰 업적을 남기고 1978년 심장마비로 귀천하여 왜관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20년간 185개의 가톨릭 건축물을 지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비문을 다시 읽어보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전업 건축가도 아닌 가톨릭 신부가 평균적으로 1년에 9~10개 건축물을 지었다고 생각하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여간한 재능과 열정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업적일 것이다. 더군다나 알빈 신부의 업적이 대부분 한국에서 이루어진 사실도 고마웠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 땅에 과거의 인연을 끈 삼아 찾아온 한 외국인 신부의 노력으로 한국의 근현대 가톨릭 건축물의 토대가 이루어진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이날 왜관성당 방문을 통해 알빈 신부를 알게 된 우연이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비문이 끝난 비석의 아래쪽에는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성당인 김천 평화성당(1958), 상주 남성동성당(1963), 부산 구포성당(1964), 제천 의림동성당(1964), 왜관성당(1966), 보은성당(1966)의 사진과 함께 한국의 성당과 경당 93, 공소 29, 기타 63개 건축물을 설계했다는 내용이 있다.
대구대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기념비 알빈 신부 기념비 옆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있었다. '대구 레지오 마리애 50주년 기념비'라 되어있었다. 레지오 마리애(라틴어: Legio Mariae)는 통칭 레지오라고도 한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운동은 1953년 목포 지역에서 시작된 가톨릭 교회의 평신도 신앙 공동체 운동이다. 사회봉사와 가톨릭 활동을 전개하는 가톨릭 단체이다. 대구대교구 레지오 마리애 운동은 1956년 부산에서 시작하였다가 1957년 경상남도 감목대리구가 대구교구에서 분할되면서 새 지평을 열었다고 한다. 대구지역 레지오 마리애 운동이 1957년 1월 13일 왜관성당 쁘레시디움(레지오 마리애 조직 중 가장 작고 기초적인 단위체)이 창단된 후 왜관, 계산, 선산, 경주, 김천, 남산, 삼덕본당으로 확산되면서 지금까지 발전하여 온 것을 기념하여 2007년 대구 레지오 마리애 운동 도입 50주년을 기념하여 단원들의 정성으로 세운 기념비였다. 왜관이 경상북도 지역의 가톨릭의 본거지라 일컬어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코로나 때문에...... 예배당 내부를 보려고 2층으로 올라갔던 아내와 나는 문이 잠겨 실망한 채 마당으로 다시 내려왔는데,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시던 수녀님 한 분이 성당 마당에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며 반갑게 인사하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수녀님은 타지에서 온 가톨릭 교인으로 생각하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네, 왜관성당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축물이라 관심이 있어 보러 왔습니다." 대답하며 마음속으로는 이 수녀님께 부탁하면 성당 내부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물어볼까 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오히려 수녀님이 먼저 말했다. "그렇지요. 왜관성당이 등록문화재이지요. 성당 `내부도 보시면 좋겠네요." 성당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찬 표정으로 말하면서 따라오라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말씀과 태도 속에서 마치 ‘내가 보여줄 수 있지요.’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잘 되었다. 잠겨 있던 성당 내부를 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수녀님 뒤를 따르려고 몸을 움직이는 순간 "우리 교인이시죠?" 하며 수녀님이 당연한 듯 무심히 던지는 한마디에 '아, 이 말은 가톨릭 교인에게만 허용하겠다는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옆에 있던 아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교회 다닙니다."하고 말하였다. 거짓말하지 못하는 품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말에 나는 "개신교 교인입니다." 하고 '교인'을 강조하여 혹시나 하며 거들면서도 속으로는 ‘아- 나의 작은 희망이 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수녀님의 무심한 한마디가 바로 돌아왔다. "아, 그래요. 그러면 안되겠네요." 수녀님도 조금 머쓱하였는지 사족을 붙인다. "코로나 때문에…….“ ‘이 나쁜 코로나 같으니라고......’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코로나 때문이라니 뭐라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요즘 코로나 방역 때문에 주일날 교회에 갈 때마다 까다로운 출입을 경험하고 있었기에 그 한마디로 교회 내부 탐방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오마이뉴스에서 받은 시민기자 명함을 보여 드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났지만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총총히 걸어가 버린 수녀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코로나가 물러가면 다시 왜관에 와서 본당을 꼭 보리라 마음먹고 그때는 이 지역의 가톨릭 성지도 방문해야겠다 생각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