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3. 보라색 맛 - 여섯 번째 이야기 "일기"

by 낭만부인

Chapter 3 보라색 맛(본능과 이성사이)


6. 일기_톱 시크릿


일기는 어린 시절 학교 숙제로 지겹도록 써보고는 단단히 끊었던 노트이다. 이 일기를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다시 꺼내들어 쓰고 있는 요즘이다. 어린 시절 검사받기 위한 일기는 하루를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일과표 정도였다면, 요즘 내가 쓰는 어른 일기는 아무에게도 꺼내어 들려줄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진짜 누가 보면 부끄러워 숨고 싶은 톱 시크릿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해가는 환경만큼이나 변해야 하는 내 마음과 변하면 안 되는 내 마음들을 정리할 시간과 장소가 너무나도 필요해 꺼내든 것이 볼펜 한 자루와 노트 하나였다. 내가 왜 이렇게 슬픈지, 왜 이렇게 우울한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타인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의 어두운 면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면 그 마음의 짐들이 많이 사라진 기분이 든다. 일기를 조용히 쓰고 나면 복잡하고 엉켜있던 내 마음의 실타래가 풀어헤쳐져 그 마음의 시작점을 볼 수 있게 된다. 좋은 해답이 떠오를 때도 있고, 해답은 없지만 마음의 무게를 덜 수 있는 감정의 저장소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라는 노래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가 나온다. 10대 시절 조성모의 음성으로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예쁘장한 그의 외모와 목소리를 감탄했을 뿐 가사가 너무나도 이상했던 기억만 있는데, 지금은 가사 하나하나가 너무 절절히 와닿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10대의 나와 20대의 나와 30대의 나까지 켜켜이 쌓인 나라서 내 속엔 내가 너무 많다는 말이 절절히 와닿는 요즘이다. 여러 역할들이 생겨나면서 여러 상황들에서 ‘이래도 될까? 저래도 될까?’라는 마음속의 물음표들이 나를 너무 시끄럽게 만드는 때면 일기를 꺼내 조용히 써 내려간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떻고, 내 생각은 어떠한지에 대해 말이다. 이렇게 한바탕 내 마음과 생각을 글로 쏟아내고 나면 그 중간 어디쯤 현명한 답이 나올 때가 많다.

“무슨 색깔을 좋아하세요?” 다 큰 어른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엔 낯간지럽지만, 가끔 내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보라색을 좋아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보라색을 보고 있으면 예뻐서 계속 쳐다보게 되고, 보라색 소지품을 사면 기분이 좋아진다. ‘좋아하는 색깔은 어떻게 해서 좋아지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긴 적이 있다. 어쩌면 ‘시각과 뇌 속의 저장된 어떤 기억들에 의해 본능적으로 끌리는 색깔이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공상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보라색인가?’를 혼자 곱씹어 보니, 내 속에는 열정적으로 빨간색처럼 살고 싶은 마음과 냉정하게 파란색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라이프 스타일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조용한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좋은 책들을 읽고 필사하는 것도 좋아하고, 주말 밤이 되면 친구들과 만나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스펙트럼이 넓다보니 이 모든 관심사를 다가진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나의 일부분만 보여주며(특히 파란색) 조금은 외로운 나로 살고 있다. 이렇게 속으로 감추었던 나의 다른 부분을 일기에 쓰기도 한다. 나는 결국 그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사람이니깐 그 색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말이다.

요즘은 여러 심리 서적들에서 외쳐댄다. ‘나답게 살라고.’ 그런데 ‘그래, 좋았어!’라고 답하기보다 ‘나답게 사는 게 뭐지?’라는 또 다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싶다. 그래서 그 또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나는 일기를 꺼내든다. 내 감정과 기분이 그 상황에서 어땠는지 조금이라도 정확히 알고 싶어서. 그래서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나다운 결정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결정하기도 한다. 나는 앞으로도 다채로운 나로 살아갈 것이다. 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색 인간으로 말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숨겨야 하는 색깔들은 나의 일기장에 남겨놓으면서.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그대여, 품고 있는 색이 너무도 많은 그대여, 본능과 이성 사이를 갈팡질팡할지라도 그대들의 균형 잡힌 ‘보라색의 삶’을 너무나도 응원한다. 보라색 인간이여, 물들지 않고 그대들의 색깔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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