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출간하고 꽤나 판매량이 좋았던 나는 출판사 대표님 추천으로 온라인으로 글을 써서 공유하는 사이트를 관리하는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첫 직장이었다. 4대 보험도 들었고, 월말마다 꼬박꼬박 월급도 들어와 엄마, 아빠에게 용돈도 조금씩 드리며 효녀 코스프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백수 시절에는 그렇게 꿈꿔온 직장인의 일상이 몸에 배일 때쯤 하루하루가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만나게 된 직장이라 더 좋은 직장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새로운 도전에 대한 목마름이었을까, 복잡한 마음으로 중학교 동창이 불러낸 술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술자리엔 얼큰하게 취해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 녀석과 친구의 직장동료라는 세 남자가 둘러앉아 있었다. 공부도 꽤나 잘했고, 사회성도 좋았던 내 친구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사무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었다.
“ 왔어? 이리 와. 이리 와. 여기는 우리 회사 같은 동기들. 너 앉고 싶은데 앉아. ” 취기 어린 장난으로 맞아준 내 친구의 말에 나도 당황한 기색을 들키기 싫은 마음에 세 명 중 가장 체구가 좋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남자 옆에 앉았다. “ 이야, 역시 내 친구! 사람 볼 줄 아네! 회사에서 제일 인정받는 분을 한 번에 잘도 맞추네!” 남자들이 있는 술자리는 오랜만이라 새침한 듯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날 밤, 우리는 3차까지 술잔을 부딪치며 직장생활의 권태로움과 애환에 대해 그리고 약간의 사회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술자리 내내 사람들은 나와 내 옆의 그분과 엮어주려는 노력을 하였고, 우리는 설렘 가득한 긴장감으로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그분은 나를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였다. 나도 싫지 않던 터라 우리 둘은 택시를 타고 나의 집 방향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가볍게 포옹을 해주곤 내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느낀 설렘과 떨림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우린 어색하게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하였고, 기분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어색해서였을까 주량을 넘겨 마신 술 덕에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한여름 밤의 꿈을 꾼 듯했다. 시곗바늘은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학교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나 3년을 연애한 남자 친구와 각자의 미래를 향해 헤어진 지 2년 만에 찾아온 설렘이었다. 그에 대한 추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차갑게 내뱉던 마지막 이별의 통보는 아직도 명치끝에 저릿하게 남아있다. 1분마다 켜본 휴대폰에는 아무런 연락이 와있지 않았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동네 북카페로 향하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앉자마자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보았더니, 잘 들어갔냐는 친구의 메시지였다. 괜히 성질이 나 휴대폰을 탁하고 탁자 위에 엎어 놓았다. 어제 했던 나의 말과 행동들을 복기하며, 오랜만에 만난 좋은 인연이 나를 어느 포인트에서 별로라고 생각한 걸까 라며 지난밤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오고 무심히 받아온 아메리카노를 휴대폰 옆에 나란히 올려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끝엔 지난봄 꺼내봤던 보라색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를 꺼내와 펼쳐보았다. 꾹꾹 눌러썼던 내 고민의 흔적이 새삼 아주 오래전일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 얼마나 간절히 원하던 지금의 일상인가. 출근할 장소가 있고, 내게 주어진 일도 있고, 한 달에 한번씩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도 있고.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지난겨울의 혹한이 떠올라 괜스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들여다본 휴대폰에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카운터로 다가가 카페 직원에게 볼펜을 빌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내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요?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 그레이스”
그때였다. 휴대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그분의 번호로 “잘 잤어요?”라는 메시지가 떠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노트를 재빨리 덮고 원래의 자리에 꽂아두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지만은 않았다. 온몸으로 울어대는 매미소리도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뜨겁고 열렬한 나의 스물다섯 번째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
하준이도 이젠 제법 씩씩하게 등원하고, 내 삶의 여유도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 다른 해와는 다르게 폭염이 일찍 시작된 이번 여름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온 나라가 폭염에 휩싸였다. 이제는 사회로 나가 돈벌이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워크넷을 켜고 이리저리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헤맸다. 결혼과 육아의 터널을 지나오니 나는 그냥 3년간의 경력사항이 텅 빈 ‘경단녀’가 되어있었다. 상담과 관련된 일을 찾다가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모집하는 1년 계약직 상담사 자리에 지원하게 되었다.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센터로 달려갔다. 세분의 실무진들이 앉아계셨고, 나는 청춘으로 돌아간 듯 떨리는 마음을 안고 면접실로 들어섰다. 면접장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편안하였고, 겉치레 많았던 예전의 면접들보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나 자신에 대해 내뱉고 센터를 벗어났다. 설렘과 떨림이 공존했던 시간을 지나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허무감이 밀려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 전에 하준이와 함께 갔던 동네 북카페로 들어섰다.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주문하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은 내리쬐고 짙은 초록의 이파리들은 더위에 축축 늘어져있었다. 커피를 받아 들고 돌아서면서 생각난 보라색 노트. ‘맞아. 그때 그 노트를 보다가 여기까지 왔지.’라는 생각으로 보물을 찾듯이 노트를 찾아 꺼내 펼쳤다.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요?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 그레이스”
언제쯤 쓰고 간 것일까. 조금 전에 있다가 간 것은 아닐까,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서로 더 좋은 인생을 걸어가세요. 그리고 마음껏 사랑하세요. - 하준맘”
가방에서 꺼낸 펜으로 마음 다해 한 자 한 자 눌러 적었다. 하준이 아빠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5년을 연애하고, 5년의 결혼생활을 함께한 남자이다. 그때는 새로 찾아온 사랑이 뭐가 그리 불안하고 두려웠을까. 한 번의 이별을 겪어봤던 터라, 더 무섭고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나의 연애기간은 더 좋은 내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로 인해 나의 가정 꾸리 기와 아이 키우기는 든든하고 평안하였다. 아이로 인해 밤잠을 설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내 마음 챙기기도 힘든 나날이 계속되면서 그 모든 불똥은 남편에게로 향했다. 나는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면서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내가 안 보이냐며 울부짖고 짜증내고 바라고 실망했던 못난 아내였다. 먹고 사느라, 엄마, 아빠 노릇 하느라, 서로에게 우리가 그토록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냉랭해진 눈빛과 말투가 오가고 그래도 살아야지라며 육아 동지로 의리 있게 살아가고 있는 나날이었다. 그레이스의 고민을 보고 있자니, 나도 사랑에 울고 웃던 예쁜 추억들이 떠올랐다. 뜨거운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라고, 설렘과 떨림으로 가득한 불타는 사랑은 없지만 편히 기대어 쉴 수 있는 휴식 같은 사랑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까똑” “밥은 먹었어? 오늘 칼퇴요” 무심한 듯 나의 식사를 챙기는 그의 따뜻함에 새삼스레 ‘나도 아직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응, 먹었어요. 저녁에 여보 좋아하는 삼겹살 구워 먹자^^고기 사놓을게.” 들뜬 마음으로 노트를 재빨리 덮고 원래의 자리에 꽂아두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지만은 않았다. 온몸으로 울어대는 매미소리도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뜨겁고 열렬한 나의 서른다섯 번째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