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권 자기 혁명] 대니얼 캐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
운전자들을 상대로 "당신의 운전실력은 평균과 비교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90% 정도가 평균 이상이라고 대답한다. 평균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무색해지는 결과다.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이 있다. 매사에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성격인 그녀는 대학 졸업 성적도 뛰어났다. 학생 시절에 그녀는 빈부격차와 세계평화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졌고, 반핵 시위 중에 경찰에 연행된 적도 있다. 다음 두 문장 중 어느 쪽이 그녀에 대한 이야기일까?
1. 그녀는 국회 도서관에서 일하는 채식주의자로, 일과 후에는 요가 수업을 듣는다.
2. 그녀는 은행 직원이다.
많은 사람이 첫 번째 진술을 참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채식을 고집하고 요가를 배우는 것은, 당신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당당한 30대 여성'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반핵 시위 경력과 뛰어난 대학 졸업 성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잠깐, 통계적으로 생각해 보자. 30대 초반 여성인 은행 직원은 우리나라에 적어도 수만 명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회 도서관 직원이 몇 명이나 될까? 채식주의자에 요가 수업을 듣는 사람은 그중에서 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진술 1이 참일 가능성과 비교하면, 진술 2가 참일 가능성은 적어도 백 배는 될 것이다.
행동경제학 스타, 대니얼 캐너먼
이것은 대니얼 캐너먼의 <생각을 위한 생각>에 나오는 사례다. 이 사례에서 우리가 통계적으로 훨씬 작은 확률을 택한 이유는 우리의 뇌가 사고하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패턴을 좋아한다. 학생 시절에 반핵 시위 경력이 있는, 매사에 의견이 확실한 30대 미혼 여성에게 채식주의와 요가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커닝 페이퍼다. 틀을 가지고 생각하는 효율성에 길들여진 나머지, 어느새 틀에 갇혀 버린 것이다.
뇌가 왜 저런 시스템을 구축했는지는 생각해 보면 뻔하다. 호랑이 줄무늬와 비슷한 것이 보였는데, 과연 저것이 호랑이일까 아닐까 하고 사색에 빠져 버리는 햄릿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노랑과 검정이 섞인 무늬만 보아도 재빨리 꽁무니를 내뺀 사람들이 살아남아서 유전자를 퍼뜨렸을 테니, 그런 사람들의 후예인 현대인들도 빠른 사고를 위한 패턴 만들기에 능숙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행동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이 당연시하는 합리성에 반대한다. 행동경제학이 지적하는 인간의 비합리적 행태에는 과신 편향, 확증 편향, 넘겨짚기(휴리스틱) 편향 등이 있다. 30대 여성의 이야기는 넘겨짚기의 전형이다. 모두가 평균 이상으로 '한 운전' 한다고 믿는 것은 과신 편향이다.
우리 뇌는 듀얼코어다
<생각을 위한 생각>의 핵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CPU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원제목은 '빠르고 느리게 생각하기'다. 우리의 뇌에는 두 개의 사고 체계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빠른 생각을, 다른 하나는 느린 생각을 담당한다. 빠른 생각은 효율적이지만 틀릴 가능성도 높다. 반면, 느린 생각은 더 정확하지만 말 그대로 느리다. 대니얼 캐너먼은 빠른 쪽을 1번 시스템, 느린 쪽을 2번 시스템이라 부른다.
시스템 1: 거의 혹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발적인 통제에 대한 감각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한다.
시스템 2: 복잡한 계산을 포함해서 관심이 요구되는 노력이 필요한 정신 활동에 관심을 할당한다. 활동 주체, 선택, 집중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과 연관되어 작용하는 경우도 잦다. (33쪽)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에 진화를 마친 우리의 뇌는 에너지 효율을 중시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뇌는 대개 1번 시스템을 활용한 결정에 만족한다. 문제는 그렇게 하다가 큰코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1번 시스템은 대개 맞는 해답을 내놓는 대단히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블링크>에서 직관의 명철함을 찬양한다. 1번 시스템이 효율적인 것은 물론이고 대개 더 정확하다기까지 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한다. 시험 문제에 대해 처음 생각했던 답을 바꾸었다가 틀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빠른 직관이 느린 숙고보다 정확하기까지 한 경우다.
반면, <생각을 위한 생각>의 핵심 주장은 1번 시스템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2번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대니얼 캐너먼은 2번 시스템을 '자신이 주연이라 생각하는 조연'이라고 부른다. 만화 <컴퓨터 형사 가제트>를 보면, 가제트 형사는 말썽만 피우고 다니는데, 그의 조카 페니가 사건을 해결하고, 칭찬은 다시 가제트 형사가 받는다. 1번 시스템이 가제트, 2번 시스템이 페니다. 2번 시스템은 중요한 문제를 그르치는 1번 시스템의 실수를 만회하고 사태를 바로잡지만, 카메라에 잡히는 빈도는 1번 시스템이 훨씬 높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2번 시스템은 조연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두 CPU의 분업은 매우 효과적이다. 문제는 두 개의 시스템이 갈등을 일으킬 때 발생한다. 붉은색으로 쓰여 있는 녹색이란 단어를 보고 붉은색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고전적인 실험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쓰여 있는 글자가 아니라 그 글자의 색깔을 말하려고 할 때, 우리의 뇌는 빠르지 않다. 머릿속에서 두 CPU가 서로 엉킨다. 질서정리는 2번 시스템의 몫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2번 시스템을 가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 문제에 대한 대답을 나중에 바꾸려고 하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진돗개 경보를 발령하라
머릿속에서 두 개의 CPU가 다른 대답을 내놓는 경우, 어느 쪽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문제는 두 개의 CPU 중 하나가 완전히 배제되는 경우다. 보통은 2번 시스템이 배제된다. 충동적으로, 또는 직관적으로 결정을 내려버리고 나면, 2번 시스템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도 나와 있듯, 사람은 한 것보다는 하지 않은 것을 더 후회한다. 대니얼 캐너먼의 조언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2번 시스템에도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내린 결정이, 심사숙고 후 잘못 내린 결정보다 더 후회스러울 테니까 말이다.
사실 1번 시스템에는 급제동 장치가 내재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위화감이다. 위화감은 현재 상황이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포착한 1번 시스템이 내는 경고 신호다. 위화감이 느껴지면, 우리는 신경을 집중하여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2번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대니얼 캐너먼의 충고는 이런 위화감을 잘 포착할 수 있도록 훈련도 하고, 더 나아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라도 중요한 결정에 관한 것이라면 한 번쯤 의심해 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믿고 싶은 쪽을 지지하는 증거만 채택하는 것은 아닌지, 사후에 알게 되었으면서 미리부터 예측하고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보라는 충고다.
행동경제학의 교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두 번 생각하라' 정도일 것이다.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하지 말고,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하자는 결론이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도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은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회피할 수 있다고 한다.
두 번 생각하는 습관을 갖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2번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직관만으로 가볍게 내린 결정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진돗개 경보를 발령하라. 지금 상황이 혹시 2번 시스템 상황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