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일행은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기로 했다.
조슈아 나무를 닮은 이계의 나무.
그늘이 시원치 않아 공격대원들은 두셋씩 따로 앉아야 했다.
진행 방향을 상의하기 위해, 박충기는 한상태와 길수연을 불렀다.
“이준기도 불러야지.”
한상태가 말하자 길수연도 찬성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이준기가 전략회의로 불려 가자, 장혁수가 낮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아, 씨발. 저 ㅅㅋ는 뭔데 자꾸 저기에 끼는 거야? 내가 레벨이 훨씬 높구만.”
이준기까지 모이자, 박충기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
“현재 맵 밝혀진 걸 보면, 현재 보급 수준으로 간신히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는 해요,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힐링 포션, 모자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
“아슬아슬할 것 같아. 간신히 되거나, 안 되거나.”
모두들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됩니다.”
“엉?”
갑자기 너무 확신에 찬 말이 나오니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운 좋게도, ‘되살아난 화염의 핵’을 구했잖아요. 그걸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설명을 좀 해주세요.”
길수연이 사무적으로 물었다.
“오크 전쟁기지의 중심부에는 세 개의 부대가 있습니다. 족장의 부대와 두 명의 주술사가 각각 이끄는 부대, 이렇게 셋입니다. 세 부대는 전부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만 풀링해도 전원이 끌려오죠. 전부 해서 30마리가 넘는 대부대입니다. 불가능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대단히 어려운 싸움이 되죠.”
“그런데? ‘되살아난 화염의 핵’은 무슨 상관이지?”
“아이템 설명에 나와 있듯이, 이건 오크 주술사들이 탐내는 물건입니다. 이걸 두 주술사 사이에 던지면, 두 주술사 부대 사이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난장판이 됐을 때, 족장 부대만 풀링해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한상태, 박충기, 그리고 길수연, 셋 모두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는 뭘까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 박충기.
어떻게 그런 걸 아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듯한 한상태.
그리고 길수연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밑질 것이 전혀 없으니까, 한번 믿어보세요. 최악의 경우라도, 그 세 부대가 동시에 풀링되는 것뿐이니까, 본전이죠.”
이준기의 제안에, 박충기가 물었다.
“하지만 그 세 부대가 모두 링크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지? 한 부대씩 풀링할 수 있는데 괜히 위험한 짓 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건, 한상태 탱커님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죠?”
“응. 그렇지. 적 무리가 어떤 방식으로 링크되어 있는지는 잘 관찰하면 보이니까. 그런데…”
“네?”
“어떻게 그렇게 탱킹에 관해서 잘 알지? 설마 탱킹을 해 보기라도 한 거야?”
“열심히 공부합니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많이 하고요.”
“저는 믿어볼래요. 이준기님 아니었으면 지옥불 호수 건너는 것, 훨씬 더 힘들었을 거예요.”
잠자코 있던 길수연의 한마디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녀의 판단은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남은 시간에 전쟁기지 바로 근처까지 진행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느린 템포로 나아갔다.
물약 장사라도 되는 것처럼 힐링 포션을 인벤토리에 꽉 채워둔 한상태가 일부를 나눠주었지만, 최대한 아껴야 한다.
자판기가 없으니까.
평소보다 느린 진행 때문인지, 밤이 되었다.
맛없는 식사를 마친 공격대원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식사 후에 두셋씩 모여 잡담을 하던 어제와는 딴판인 광경.
이준기는 오늘도 불침번을 서겠다고 자원했지만, 박충기가 거부했다.
“그런 건 사절이야. 적어도 내 공격대에서 저레벨을 착취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이준기는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쉽게 잠이 드는 체질인 이준기였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길수연이 소리를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성나린과 그 정도로 친해진 걸까.
아니, 겉으로는 쿨한 척해도, 길수연은 속이 여린 사람이라서 그렇다.
누가 죽었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손에 꼽을 정도이기는 했지만, 이준기는 길수연이 우는 것을 지켜본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계속해서 꾸역꾸역, 속으로만 구겨 넣는 울음소리.
그렇게 울던 그녀를 지켜보던 기억이, 지금 어두운 밤하늘 아래 어딘가에 겹쳐 들린다.
***
아침 점호를 하던 박충기는 장혁수가 또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같은 길드인 소현배에게 물었다.
“장혁수 못 봤어? 이 자식이 이제 내 말을 아예 무시하네.”
“또 어딘가에 가서 늑대라도 잡고 있겠죠. 여긴 늑대가 아니라 아마딜로라도 나오려나?”
“자기 아버지 백 믿고 내 말을 우습게 아네. 어떻게 하지?”
“길마님이 자꾸 그놈 편을 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남궁훤한테 뺏은 ‘오캄’도 그냥 그놈에게 주고.”
“아직도 그 소리냐?”
소현배는 작정한 듯이 하소연했다.
“그거, 누구한테라도 좋은 무기입니다. 저한테도 아주 좋은 무기고요. 남궁훤을 잡은 것도 저고요. 장혁수는 미끼 노릇을 했을 뿐이죠. 상식적으로도 그렇잖아요? 17렙이 25렙을 잡았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길마님?”
“당연히 네가 잡았겠지. 그런데 혁수가 미끼 역할을 했다면서. 혁수 놈도 공이 있기는 한 거지.”
“아무튼, 저는 아직도 많이 서운하다는 거, 기억해 주세요.”
“길드 돌아가서, 정산해 주마. 내가 공과는 확실히 챙기잖냐.”
“정말요? 장혁수 그놈의 ‘과’는 별로 챙기시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화나려고 그런다. 그만하자.”
과연, 공격대원들이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장혁수가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검붉은색으로 굳어진 핏자국 위에 신선한 새 핏자국이 선명했다.
“너 이 자식, 내 경고가 우스워?”
“아이, 대장님 또 왜 그러세요. 공격대에 도움이 되려고 경험치 쌓으러 나간 건데. 잠도 안 오고요.”
“지금 네 행동에 대해서 나만 불만이 있는 게 아냐. 조심하라고!”
“오늘 보스 잡으면 던전에서 나가잖아요. 아버지한테 후원 크게 좀 하라고 잘 말할게요.”
후원금 이야기로 박충기를 제압했다고 생각한 장혁수는 모닥불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미 불씨만 남아 꺼져가는 모닥불이었지만, 왠지 그 주위에 앉아야 할 것 같았다.
옆자리에 소현배가 앉으며 말을 꺼냈다.
“무기는 잘 들어? 쪼렙에 쓰려니까 후달리진 않고?”
“아, eighteen. 소 선배님.”
“뭐, 열여덟?”
“이거 제 거로 결정 난 거잖아요. 돈도 낼 거고요.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장혁수가 양손으로 따옴표를 그리며 이죽거렸다.
“이해가 안 될 수밖에. 난 동의한 적 없거든.”
“아니, 제기랄! 내가 팔 짤려나가면서 탱킹 안 했음, 남궁훤 그놈 잡을 수 있었을 거 같아요?”
“그놈을 네가 잡았냐? 내가 잡았지. 너야말로 이해가 안 돼? 구원자 하루 이틀 한 거야? 어제 각성했어?”
“내가 그놈 숨통을 끊었잖아요. 막타 날렸다고요. 뭘 모르시네. 게임을 안 해보셨나?”
“너 같은 강아지 보는 것도 지쳤다. 내가 길드를 나가야겠다.”
“그래, 나가라, 이 양민 ㅅㅋ야.”
“이 ㅅㅋ가!”
소현배가 일어서자, 장혁수도 일어섰다.
근처에 있던 한상태가 달려와서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공격대다. 싸움을 하려거든 일단 보스까지 깨고 나서 하든가 해.”
한상태의 단호한 어조에, 일단 둘은 갈라섰다.
둘은 진한 앙금이 남은 한마디씩을 교환했다.
“나중에 좀 보자.”
“던전 끝나고 보죠, 형씨.”
레벨 차이가 엄청난 소현배에게 마구 들이대는 장혁수의 모습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차원문 안에서도 바깥세상의 권력이 먹힌다는 얘기일까.
어쩌면, 누구 말대로 돈이 목숨보다 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