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을 나오고 보니 오후 6시였다.
굉장히 빨리 돌았다고 생각했지만, 열두 시간이 넘게 걸린 것이다.
차원문 바깥에는, 담당 중령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최상혁 대위가 바짝 언 자세로 서 있었다.
한 소리 듣는 중인 모양이었다.
이준기가 차원문 앞에 스르르 나타나고, 곧이어 차원문의 크기가 눈에 띄는 속도로 줄어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최상혁 대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이준기 구원자님! 이게, 설마… 차원문을 닫으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준기는 대위 뒤에 서 있는 중령을 알아채고 덧붙였다. "대위님 덕분입니다.”
“그, 그동안, 다섯 명 구원자 파티 네 팀이 들어가서 전부 전멸한 곳인데… 어떻게…”
상황 파악에 시간이 걸린 중령도 달려들었다.
“구, 구원자님! 이걸 혼자 닫으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최상혁 대위님이 도와주셔서.”
“하, 하루도 안 지나서 차원문을 닫고 나오시다니…”
“성함이… 고영성 중령님이시군요. 최상혁 대위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위님 아니었으면 성공 못 했을 거예요.”
“아… 네!”
풀 파티 공격대가 진입했다면, 이 근처는 며칠 동안 기자들의 난민촌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이 들어간 상황.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나온다 하더라도 오늘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차원문 안으로 단 한 명의 구원자가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나 했을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기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기 기자라고 합니다. 성함이 이준기 구원자님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으십니까?”
“네.”
“제가 보기에는 지금 차원문이 소멸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맞죠?”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운이 좋았죠.”
이준기의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기자가 얼른 말했다. "구원자님, 제가 저녁 사드릴게요. 같이 가시죠."
"선약이 있습니다." 이준기가 대답했다.
"선약이요? 오늘 아침에 차원문 들어가서, 12시간 만에 나올 거라고 예상을 하셨다는 얘깁니까, 지금?"
"아, 그게 아니고요..."
"저랑 얘기 좀 하시죠. 저녁 식사도..." 기자가 이준기의 소매를 잡으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이만!"
이준기는 냅다 뛰었다.
***
이준기는 윤동직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저녁 안 드셨으면 제가 모시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어, 준기야. 나는 좋지.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준기는 차가 없잖아.”
“지금 강남구 수서동인데요, 어차피 숙소로 돌아가야 하니 제가 형님 집 근처로 갈게요.”
“숙소면, 광화문이던가?”
“네. 그러니까 여기 수서역에서 3호선 타고 그냥 죽 올라가면 되거든요, 중간에 옥수역에서 내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지도 보니까 그 근처인 것 같은데.”
“그래, 뭐 옥수역이 가깝긴 할 거야. 그런데 지하철 안 탄 지 좀 돼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3호선을 타고 거기에서부터 오겠다고? 그냥 내가 데리러 갈게. 수서동 어디야?”
윤동직이 차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이준기는 기다렸다.
김대기 기자가 근처에서 그를 찾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포기한 모양이다.
20분쯤 지나 윤동직이 포르쉐를 몰고 나타났다.
옥수역까지 지하철을 탔으면 한 시간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차에서 내리는 윤동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둘러 거리를 좁힌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을 활성화했다.
마치 자신의 것을 보는 것처럼, 윤동직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구원자를 상대로, 던전 밖에서도, 발동된다.
- 20레벨.
- 전문화: 빛 12, 흙 8.
- 강인함 60. 민첩성 35. 통찰 10. 집중 10. 물리 저항 20. 마력 저항 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저지.
- 인벤토리: 다마스커스, 숲 지기의 장갑, 티타늄 방패, 오크 분쇄자의 검, 하급 힐링 포션 2개, 중급 힐링 포션 8개, 기본 식량 팩 4개.
생각대로다.
스탯은 탱커 트리로 나쁘지 않고, 획득 스킬은 하나, 성흔은 없다.
이준기가 보는 화면이라서 성흔이 없다는 설명이 나오는 것이고, 윤동직이 보는 화면에서는 성흔이라는 항목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일부 구원자들이 자신의 성흔을 자랑하는 바람에 성흔의 존재 자체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구원자들이, 어떤 성흔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체의 2%가 성흔 보유자라는 통계도, 한참 나중에 조슈아 테일러 소속 단체가 조사해 발표한 것이다.
많은 구원자들이 자신의 성흔을 숨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에게 떳떳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성흔들이 존재해서다.
아이템을 파괴하고 마력을 흡수하는 ‘느뤼엘의 흡수’도 그런 종류.
하지만 조슈아 테일러의‘카인의 징표’만 하랴.
다른 구원자에 대해서 공격력이 증가하며, 구원자를 죽이면 스탯이나 스킬을 획득하는 성흔이다.
세상의 모든 축복을 가지고 구원자로 각성했다는 조슈아 테일러에게 성흔의 선택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는 처음부터 포식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성흔을 고른 것이다.
윤동직의 포르쉐를 타고 광평교를 건넜다.
자기가 아주 잘 아는 맛집이 있다면서, 둘은 가락시장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아직 통행금지가 풀리지 않아 텅 빈 광평교.
가속페달을 냅다 밟으며 질주하던 윤동직이 말했다.
“어? 생각해 보니까, 여기 차원문 있던 데 아닌가? 군인들만 잔뜩 있고 차원문이 안 보이네?”
이준기는 잠자코 있었다.
***
“반대하시는 분, 없죠? 당연히 없겠지만.”
자리에서 일어선 이도협 회장 대행이, 회의 탁자 주위에 둘러앉은 길드 회원들에게 물었다.
9월 20일 아침 10시, 특별 회의.
종로 타워 23층 대회의실에 충무공 길드 소속 구원자 26명이 전부 모였다.
앞쪽 자리에 앉은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으로 이도협을 쳐다보았다.
- 27레벨.
- 전문화: 불 10, 바람 11, 마나 6.
- 강인함 50. 민첩성 75. 통찰 15. 집중 10. 물리 저항 20. (+5) 마력 저항 2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텔레키네시스, 블러, 도깨비불.
- 인벤토리: 흑요석 칼날, 크레센트, 살인 예술가의 장갑, 어둠 사냥꾼의 흉갑, 토끼 발 장화, 중급 힐링 포션 10개, 고급 식량 팩 8개.
아이템도 상당히 훌륭하고, 희귀 스킬도 세 개나 된다.
이 정도면 전국 랭킹 6위에 부끄럽지 않은 세팅이다.
예상대로 성흔은 없다.
‘성흔이 있었다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인물이지.’
이도협 대신 권영호가 죽었으니 길드협회 내분은 원래 양상과는 다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러나 이렇게 서두를 줄이야.
얼마 안 남은 협회장 선거 때문이리라.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도협으로부터 멀리 반대편에 앉아 있던, 흰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헛기침에 이어 입을 뗐다.
"길드끼리 합치는 건 그렇다고 치고, 대체 왜 우리가 이상덕 회장을..."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러게 말야."
"이상덕 회장을 지지한다고 길드 차원에서 성명을 낸다니?"
빨간색 글씨로 ‘주목’이라고 쓰인 야구공이 어디에선가 나타나, 테이블 양쪽을 날아다녔다.
이도협이 언제나 즐기는 장난이다.
희귀 스킬 텔레키네시스가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우리 길드가 구원자 윤리 협회도 아니고, 실리를 챙겨야죠. 지지 선언이 대숩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탑픽은요? 거긴 이상덕 협회장 지지 선언, 괜찮대요?”
다른 사람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거긴 뭐, 원래 협회장 파벌이잖아.”
“자자, 여러분! 파벌이 뭐 중요합니까. 실리가 중요하잖아요! 지금 당장 탑픽이랑 합치면, 이상덕 협회장이 100억 지원해 준답니다. 당장 다음 주부터 24층 스카이라운지, 여러분들 구내식당으로 만들어드립니다!”
“오오!”
갑자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길드가 100억 원을 받든 말든, 나눠 먹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길드 회원들은 별 관심이 가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24층 스카이라운지를 당장 사들여 구내식당을 만든다면, 얘기가 다르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거, 약속하시는 거죠?”
“이상덕 협회장 만세!”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이도협은 잠시 기다렸다.
조용해진 다음에야 그는 말을 이었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투표할 필요 없는 거죠? 다들 찬성하신 겁니다.”
“끄응.” 강찬성이 탐탁지 않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굳이 혼자서 반대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준기로서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돈 받고 지지선언을 하는 게 협회 규정 상 괜찮은 건지 조사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대형 길드라면 관할 차원문 수가 늘어나고, 레벨업에 더 좋은 환경이 된다.
게다가 이준기가 반대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이상덕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선택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준기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리 길드와 탑픽, 이렇게 둘만 합치는 겁니까?” 뒤쪽의 누군가가 물었다.
“아, 좋은 질문이네요. 일단 우리 둘이 합치지만, 코리아 길드도 현재 내부 협의 중이에요.”
“코리아 길드요?”
“일단 탑픽 길드와 합친 다음, 코리아 길드를 흡수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전국 단일 최대 길드가 됩니다.”
웅성거림이 다시 일어났다.
전국 단일 최대 길드가 되는 게 좋은 일인 모양이다.
이준기는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스위스 어디에서 5천만 원을 주고 주워 왔다는 낡아빠진 고물 뻐꾸기시계가 회의장 한쪽 벽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10시 반.
시간이 되었다.
길 건너편이 보이는 창문을 마주하고 앉은 회원 몇 명이 일어섰다.
그리고 창문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저거!”
모두들 그쪽을 쳐다보았다.
길 건너편, 종각역 4번 출구, 그러니까 보신각 바로 앞에 희푸른 소용돌이가 나타나서 크기를 불려 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