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문 안으로 들어오고 나면, 맛이 끔찍한 던전 식량팩을 먹어야 한다.
구원자에게 가장 큰 고난은 바로 던전 식량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컵라면이라니.
인벤토리에서 꺼낸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며, 문아린은 눈을 반짝였다.
"우와, 오빠 덕에 던전 안에서 이렇게 맛있는 식사라니."
"그러게." 이준기가 대답했다. "나는 컵라면이 나오길래 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반대인가 봐."
"준기 오빠, 얼마 전 비 오는 날 천변에서 달리기하셨죠?" 문아린이 두서없이 물었다.
이준기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운동은 늘 하는 것이다.
탱커 시절부터 컨디션 유지를 위해 늘 지켜온 습관이다.
구원자들은 건강 관리가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오해다.
구원자로 각성하면 전반적인 건강 관리에서 우월한 조건을 갖게 되는 건 맞지만, 관리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게 벌어진다.
천변에서 달리기라면, 해운대 차원문 다음, 세종고 정리하기 전에 이틀 정도 일정이 비었던 때였을 것이다.
실내에서 운동하는 것이 지겨워서, 약한 비가 내림에도 천변을 달렸다.
"맞아, 그랬던 것 같네." 이준기는 그때 일정을 되짚어보며 말했다. "나를 보기라도 한 거야?"
"오해하지 마세요. 저 스토커 아니거든요.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 봤어요." 문아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아린이 집이 그 근처였나?"
"집이야 광주지만, 서울에도 숙소가 있어서 자주 들른다고요."
하긴, 구원자들은 거주에 있어 자유가 좀 많은 편이기는 하다.
길드 차원에서 이런저런 거점에 숙소를 마련해 놓거나, 호텔 체인과 계약이 돼 있는 경우도 많다.
지방 길드라고 해도, 서울에 거점 하나 정도는 마련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날 본 거구나."
"네. 오빠가 막 뛰다가 갑자기 멈추는 걸 봤죠."
"응?"
"뭘까 하고 보니까, 바닥에 달팽이가 있더라고요. 그걸 피하시다니, 하하."
문아린은 언제나 그렇듯 털털한 웃음을 웃었다.
"아, 그건 아무래도. 달팽이가 아니라 지렁이라 해도..."
"맞아요. 달팽이 밟으면 기분 안 좋죠. 하지만, 달팽이를 안 밟으려고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 많을까요."
"그런가?"
"그다음엔, 달팽이를 길섶으로 옮겨줬잖아요.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옮겨 가지고... 하하. 그런 일까지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이준기는 그저 지나쳐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문아린이 말을 이었다.
"준기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아니,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 그런 건가.
이준기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 구하기>를 시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눈이 정확했던 거잖아요. 지금 이 상황이 증거죠." 문아린이 또 말을 보탰다.
이준기는 잠깐 망설였다.
날 믿지 말아요, 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어차피, 부나방처럼 사라질 존재다.
조슈아와 일전을 벌이고 설마 살아남는다고 해도,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내게 주어질까.
"쑥스럽네, 그런 얘기." 이준기는 자기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믿어줘서, 고마워."
"아차, 컵라면!"
문아린이 외쳤고, 둘은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
라면 먹고 나서도 한참을 기다렸지만, 주석은 텔레포트 위치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주석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안 올라오는 거야.”
“여기가 어떤 구조인지 모르잖아요?”
“상상을 해봤겠지. 그것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나눠가면서.”
“준기 오빠처럼요?” 문아린은 잠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진행하는 사람이 또 있다고요?"
"당연히 있지." 이준기는 문아린을 바라보았다.
키라트라든가 헬렌이라든가, 예전 멤버들이 그를 만나고 한두 번 차원문을 드나들고 나서 짓고는 했던 표정이다.
"그건, 신선하네요." 문아린이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중견 구원자잖아요. 이 렙까지 오면서 오빠처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또 있다니."
"세상은 넓어. 숨은 강자는 얼마든지 있겠지."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준기도 주석에 대해서는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주석이 강자라는 거죠? 한상태나 이도협 같은?" 문아린이 물었다.
"아하, 한상태, 이도협이 문아린 공인 강자들이구나?"
"한상태, 이도협, 고성하, 길수연. 유명하잖아요. 일본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랭킹 매기는 거 좋아하잖아요. 구원자 랭킹 외우고 다니는 사람들 많아요."
"혹시, 아린이도?"
"1위 한상태 2위 고성하 3위 전용 4위 박충기 5위 이상덕.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 확인한 랭킹이에요."
문아린은 술술 말했다.
"아린이는 몇 위?"
"전 56위요. 아직 멀었죠. 별로 야심은 없지만."
"그래도 그걸 외우네. 하하."
"그래도 자기에 관한 건데, 궁금하지 않아요?"
"글쎄. 나는 별로..."
"오빠는 146위예요." 문아린이 냉큼 말했다. "100위 바깥은 집계가 정확하지 않다는 말도 있지만."
역시, 피라미드 아래쪽에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총알받이 역할을 해야 하니까.
***
사원 안이라서 여전히 조명이 밝았지만, 창밖 풍경은 이미 밤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아린아, 일단 먼저 좀 자둬. 망은 내가 볼게.”
“후아. 그럼 좀 부탁할게요. 너무 졸리네요.”
“당연한 거잖아. 벌써 열한 시네.”
혼자인 주석과 달리, 이쪽은 두 명.
숫자의 우위는 단지 화력의 우위에 멈추지 않는다.
잠을 자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이준기는 던전 입장 전에 언제나 그러하듯, 잠을 많이 자두었다.
잠이 저축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된다.
주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기습이 최선의 전략이고, 그 시점은 밤중이다.
그러나 새벽 한 시, 두 시가 되어도 이준기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거 곤란한데. 나도 조금쯤은 자둬야 하는데. 이왕이면 내가 불침번 서고 있을 때 좀 올 것이지.’
새벽 네 시가 되었다.
문아린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준기 오빠, 몇 시예요?”
“네 시가 됐는데, 아직도 조용하네.”
“어, 벌써 네 시나 됐어요? 미안해요, 준기 오빠.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 오빠도 좀 자요.”
“그래, 그럼. 두 시간만 잘게. 꼭 여섯 시에 깨워줘. 물론, 그 전이라도 주석이 올라오면 곧바로 깨워주고.”
“네. 그럴게요.”
“주석만 처리하고 나면 푹 자고 진행해도 되니까.”
“네.”
***
“헛!”
이준기는 깜짝 놀라면서 일어났다.
“몇 시야, 지금?”
“일곱 시요. 아직 아무 일 없어요. 더 주무셔도 되는데.”
“아, 아냐. 이제 일어나야지.”
이준기는 눈을 부릅떴다.
상태창을 열어 미션 내용을 확인했다.
24시간의 제한 시간이 있는 미션.
9월 25일 토요일 아침 7시 현재, 일곱 시간 반이 남았다.
‘오크 병력 배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원 붕괴 미션은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걸 믿고 여기에서 계속 주석을 기다려도 될까?’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이준기의 표정을 보고, 문아린이 물었다.
“주석, 혹시 죽은 거 아닐까요?”
“가능성이 0은 아니겠지만, 죽지는 않지 않았을까?”
“여기 붕괴시켜야 되잖아요?”
“아린이도 짐작하겠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주석을 기다린 이유는.”
“뒤통수 맞을까 봐 그런 거잖아요.” 문아린이 냉큼 대답했다.
“그렇지. 그 위험을 계산에 넣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 그걸 오빠가 저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의견은 들을 수도 있잖아. 참고만 할게. 부담 없이 의견만 줘봐.”
“음, 글쎄요.”
문아린은 엄지와 검지로 V자를 만들어서 턱을 괴고 잠깐동안 오른쪽 위를 쳐다보았다.
“음…”
“의견은?”
“일단 여기 진행해요. 주석도 제정신이라면 몬스터와 싸우는 우리를 기습하진 않겠죠. 우리 죽고 나면 자기도 죽을 텐데.”
“주석. 어떤 기술을 쓰는지 알아, 혹시?”
“몰라요. 오빠는 알아요?”
이준기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어제. 네가 먼저 여기 올라온 다음에, 주석이 한참 자기에 대해 떠들었거든. 거짓말이나 과장이 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주석의 성격을 보면 자기가 어떤 기술을 쓰는지에 대한 부분은 믿어도 될 거야.”
“그래요? 무슨 얘길 했는데요?”
“주석은 스킬 트리는 어둠과 바람. 희귀 스킬로는 ‘귀검’을 자주 쓴다고 하더군. ‘소멸’ 얘기를 안 한 거 보면, 아마 그건 습득하지 못한 것 같고.”
물론, 이 정보는 성흔 이르헬의 눈을 통해 주석의 상태창을 직접 보고 확인한 내용이다.
“귀검? 소멸?”
“귀검은 2초 동안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는 기술이야.”
“에, 그래요? 얼마나 빨라지는데요?”
“눈에 안 보인다고 하던데. 이건 주석의 말이 아니고 인터넷에서 본 거야.”
“엑. 그거 욕심나네.”
“소멸은, 연막탄 쓰고 사라지는 기술이지.”
“닌자처럼요? 아까 김형채가 투명 망토인지 뭔지를 쓰고 절 죽이려고 했는데, 그거랑 비슷하네요.”
“아마 비슷할 거야. 안 보이게 되지만, 기척은 감지할 수 있지. 소리, 냄새. 그런 걸로.”
“그러니까, 오빠 얘기는, 주석이 몬스터와 싸우는 우리를 공격해 죽이고 나서.”
“귀검을 써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였지. 역시 똑똑한 아린이.”
“’거였지’는 뭐예요?”
“귀검으로 도망갈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어. 아린이는 아마 경험이 없겠지만, 몬스터 이놈들은 한번 쫓아오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들이라서.”
“에? 그래요?”
“소멸로 없어진 상대는 웬만하면 못 찾지. 그래서 포기하는데. 귀검으로 도망가는 건 결국 쫓아오거든. 귀검으로 몬스터의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던전을 나갈 경우만이야.”
“아하. 그렇다면, 주석은 소멸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우리만 죽이고 도망가는 방법은 사용하지 못하겠네요?”
“그렇지.”
“주석이 준기 오빠한테 거짓말한 거면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미션 시간제한, 이제 일곱 시간 정도 남았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군요.”
“그래.”
이준기는 도박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르헬의 눈 덕분에 도박은 안 하게 됐지만, 대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