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62. 회상

by 히말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죠." 주석이 말했다. "어휴, 쪽팔려."

"그게 할 말이야? 생명의 은인한테?" 문아린이 항의했다.

"그래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죠. 아찔한 것도 마찬가지고." 주석은 침을 삼키고 덧붙였다. "죽을 뻔했으니까."

"그래, 네 말대로 죽을 뻔했지. 사실, 난 준기 오빠가 널 왜 살려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주석이 느닷없이 크게 웃었다.

"하핫! 역시 아린 누나는 솔직해서 재밌다니까요!"


길수연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문아린의 솔직한 성격이 재미있다는 주석의 의견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주석이 그런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 신이 나서 떠들었다.

"길수연 구원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글쵸?"


"어쨌든, 다 잘됐으니 다행이잖아요?" 길수연이 대답 대신 물었다.

"맞아요!" 주석이 손뼉을 치면서 응수했다. "다 잘 됐다고요! 그때 준기 형이 절 죽였다면, 오늘 밤 준기 형이 기억을 되찾지는 못했을걸요?"


모두의 시선이 이준기를 향했다.

이준기가 길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요. 충격요법이 먹힌 것 같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냥 아무 일 없었어도, 하루 이틀이면 기억이 돌아왔을 거야." 문아린이 말했다.

"충격요법이 먹혔다니까요!" 주석이 끼어들었다 "제가 칼 들고 덤비니까, 어, 이건 막아야겠는데? 이런 생각 하신 거 아녜요? 맞죠, 준기 형?"


"하긴 칼 들고 덤비는 남자가 얼마나 무섭겠어요." 길수연이 코멘트했다.

"그럼요! 그러니까, 오늘 밤 저는 준기 형한테 진 빚, 갚은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좀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길수연이 물었다.

"아, 물론이죠!" 주석이 흥에 겨워 대답했다.


***


눈을 뜬 주석은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쓰러진 곳은 분명히 돌바닥이었는데.


왼손의 통증도 사라졌다.

아니, 상처도 없어졌다.

입가를 훔쳐보니 힐링 포션이 조금 묻어났다.


"아, 이거..."


푸른 하늘, 초록이 현란한 초원, 시원한 바람.

맵 중앙의 거대한 나무는 그대로였지만, 나무 위의 거대한 집은 사라졌다.

오크 사원이 붕괴된 거구나, 하고 주석은 생각했다.


상태창을 열었다.

안 읽은 메시지 여러 개가 떠 있었다.


- 미션 ‘고공 침투’를 완료했습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조금씩 기억이 났다.

이준기의 어깨에 칼날을 찔러 넣은 건 좋았지만, 다시 빼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준기의 다음 공격을 손바닥으로 막아야 했다.


손바닥에 칼침을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아팠다.

그래서 바닥을 구르며 난리를 치는 사이에, 뒤통수에 묵직한 타격과 함께 띵 하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고 나서, 둘이 던전 깨고 날 여기 눕혀 놓고 힐링 포션까지 먹여줬다는 얘기군.'


주석은 일어서서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 한가운데에 쨍하니 해가 떠 있었다.


'살아남았으니 좋아해야 하나?'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차원문 소멸까지 겨우 13분 남았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쪽 팔릴 시간이구나.'


주변에 없는 걸 보면, 이준기와 문아린은 이미 차원문을 나간 모양이다.

차원문 소멸 기자회견도 했겠지.

그런데 차원문이 아직 소멸하지 않은 걸 보고, 사람들은 누군가 아직 던전 안에 있다고 짐작했을 것이다.


패배자가 누구일까 궁금해하는 기자들 앞에 떡 하니 나타나야 한다고?


"하, 그냥 죽는 게 나았려나."

드넓은 벌판 한가운데에 서서, 주석은 혼잣말을 했다.

"아냐, 죽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살아야지. 하하하!"


***


사상 초유의 FFA 포맷 차원문, "종각"은 그렇게 소멸했다.

살아서 돌아온 구원자는 단지 셋뿐이었다.


- 브릴리언트 길드 소속 딜러, 주석. 27레벨.

- 신선자 길드 소속 딜러, 문아린. 25레벨.

- 충무공-탑픽 연합 길드 소속 딜러, 이준기. 23레벨.


기자회견이 보도자료 배포로 대체되고, 이준기가 기자들을 피해 다니자 언론의 관심은 문아린에게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시간 늦게 차원문을 나온 주석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광주광역시 동구청 근처의 어느 골목.

문아린이 경영하다가 지금은 여동생에게 맡겨 놓은 커피숍, ‘별’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문아린 구원자님은 카페에 자주 안 오시나요?”

“가족으로서, 문아린 구원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중견 구원자로서 돈도 많이 버실 텐데, 카페를 계속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커피숍이라고 해 봐야, 테이블이 열 개도 되지 않는다.

목은 좋지만, 경쟁도 심한 지역이다.

바로 근처에 커피숍이 열 개도 넘게 있는데, 매달 새로 하나씩은 더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밀려드는 걸 싫다고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문아린의 동생, 문아영은 웃으면서 기자들에게 대답했다.


“언니가 원래 카페 하는 게 꿈이어서요. 오랫동안 준비해서 간신히 오픈한 가게예요.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가게를 접을 수는 없잖아요. 여기 아메리카노 세 잔 나왔습니다.”


기자는 아메리카노를 받침 채로 받아, 뒤에 서 있던 사람에게 통째로 넘겼다.

커피를 샀으니 질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기자는 뒤에 줄 선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한 마디를 더 했다.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종각 던전에서 무슨 아이템이 나왔는지는 왜 아직 공개를 하지 않는 겁니까?”

“제가 협회 사람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협회 쪽에서도 시원하게 말을 안 해줘서요. 혹시 문아린 구원자님한테서 들으신 얘기는 없나요?”

“아뇨. 언니는 저한테 일 얘기는 거의 안 해요.”

“아, 그렇군요. ‘동생에게 일 이야기는 거의 안 하는 문아린 구원자.’ 이렇게 써도 되겠습니까?”

“네, 네. 뒤에 줄 서신 분들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사실, 이번 던전 이야기는 언니에게 귀가 아프게 들은 문아영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문아린은 동생에게 종각 던전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특히 사원 기둥 뒤에서 둘이 컵라면 먹던 이야기는 거의 외울 지경이다.

그 이야기 외에도 문아린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부터 이준기와 한 팀이 되기로 약속한 이야기, 북쪽 끝까지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김형채라는 사람이 휴전하자고 말하고 나서 뒤통수를 쳤던 것 등등.

바로 전 던전 ‘해운대’에서 겨우 500골드로 에픽급 양손 도끼를 먹었다고 엄청 좋아하던 언니가, 웬일인지 이번 던전에서 무슨 아이템을 얻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문아영은 물었다.


“그런데 언니, 아이템은? 뭐 좋은 것 좀 먹었어?”

“응. 몇 개 좋은 걸 먹기는 했지.”

“뭔데? 어디에서 나온 거야? 이준기 오빠랑 반띵 한 거야? 설마, 두 사람이 주사위 굴리고 그런 건 아니지?”

“그 아이템들을 쓸 수나 있을까. 아이템 얘기는 나중에 하자.”


문아영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구원자들끼리 서로 죽이는 던전이었다면, 죽은 사람들의 아이템을 어떻게 했겠나.

문아린이 얻어온 아이템 중에서는 다른 구원자가 쓰던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아이템이라면, 쓰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이다.


예전에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때까지 길게 오픈했던 가게지만, 요즘은 점심시간 중심으로 짧게만 영업한다.

오전 10시 30분에 오픈, 오후 4시 30분에 문을 닫는다.


겨우 여섯 시간만 열어도, 커피 찌꺼기가 대형 쓰레기통에 가득 찼다.

예전에는 커피 찌꺼기를 종이컵에 담아 손님들에게 무료로 가져가게 놓아두고는 했다.

그러나 요즘은 너무 바빠서, 그런 일을 할 겨를도 없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렇게 경쟁이 심한 상권에서. 복 받은 거지.’


문아영은 가게 문을 닫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문아영은 문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장사 잘되는 건 좋은데, 기자들이 너무 많이 와.”

“미안하다, 아영아. 내가 우리 카페를 홍보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가니까 내가 어쩔 수가 없네.”

“기자들 질문에 계속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고, 도대체 뭐라고 그래야 돼?”

“무슨 질문?”


“언니랑 이준기랑 사귀냐고 자꾸 묻는단 말야.”

“하하.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답이 확실하네. 아냐. 아니라고.”

“어, 그래? 좀 의외네.”

“의외는 무슨 의외. 내가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 같아? 네가 보기엔?”

“언니,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아냐? 그 오빠 얘기할 때 보면, 고등학교 때 형석이 오빠 얘기할 때랑 비슷한데?”

“아냐!”


문아린이 발끈하는 소리에, 문아영은 잠깐 쉬고 말했다.


“농담이야. 왜 그렇게 반응이 격렬해? 더 수상하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아영아, 비밀 지킬 수 있지? 나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우울해.”

“뭔데, 언니? 말해봐. 비밀 지킬게. 형석이 오빠 때도 내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잖아.”

“준기 오빠,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 같아서.”


“엥? 정말? 언니 같은 미인을 놔두고… 몹쓸 놈, 아니 몹쓸 오빠네. 그게 누군데?”

“이뻐. 길수연이라고.”

“그래? 뭐 하는 여잔데? 모델이나 영화배우라도 되는 거야?”

“아니, 구원자.”


문아린.png 문아린


***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제1부 <회귀>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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