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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의 정체

[책을 읽고] 카를로 로벨리, <화이트홀>

by 히말

단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물리학 이야기를 꺼내는 아저씨, 카를로 로벨리.

그의 책을 처음 만나 읽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코로나-19로 거의 모든 시설이 폐쇄되었던 봄,

아파트 단지 안을 산책하며 길게 늘어진 버들(?)가지를 피하며 걷던 것을 기억한다.

TTS 목소리의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양자적 우주조각 이야기는 묘하게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점점 더 그런 경향을 더해가는 카를로 로벨리의 요즘 책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지금까지 나온 책들 중에 어쩌면 가장 그런 느낌이 강한,

다시 말해 이게 시인지 수필인지 물리학 설명인지 모르겠는, 그런 책이 이 책이다.



로벨리의 이야기


이 책에 나오는 물리학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물론 그 수학은 심오하겠지만, 카를로 로벨리의 대중교양서에 수학은 나오지 않는다.)


화이트홀은 시간이 거꾸로 된 블랙홀인 것이죠. (3장 1절 중)


이는 그와 동료 과학자 한 명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지만, 그들은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에서 도출된 해라고 말한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이해를 포기한 대니얼 데닛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 주장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카를로 로벨리의 루프양자중력 이론은 현재 시점, 초끈이론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그러나 매우 마이너한) 대안 이론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시공간 자체가 양자적이라는 것이다.

(수학을 무시하면 별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이 이 이론의 장점이다.)


따라서 블랙홀의 내부에서 붕괴하는 시공간 역시 그 '양자적' 크기, 즉 플랑크 길이 이하로 수축할 수 없다.

(바로 이 시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디랙의 양자역학은 서로 어긋나 버린다. 그걸 풀겠다고 수많은 천재 물리학자들이 덤비고 있고, 가장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초끈이론이다.)


바로 이 영역에서, 카를로 로벨리는 블랙홀이 '양자 도약'을 일으켜 화이트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공간적이지도 시간적이지도 않은 현상입니다. 그것은 공간이 한 구성에서 다른 구성으로 양자도약하는 현상입니다. 루프 양자 중력 이론은 이러한 종류의 양자도약 즉 공간의 한 구성에서 다른 구성으로 점프하는 것을 기술합니다. (2장 4절 중)


화이트홀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화이트홀이 맞다.

그러나 아직 관측된 적도 없는 화이트홀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로벨리는 수학적 풀이와 자신의 이론을 활용해서 화이트홀을 설명한다.


외부 관찰자는 화이트홀과 블랙홀을 구별할 수 없다.

화이트홀은 계속해서 입자를 방출한다.

블랙홀과 달리, 화이트홀의 지평선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로벨리의 화이트홀 이론은 수학적 풀이를 제외하면 일반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와 다른 점이 거의 없다.

빅뱅의 정체가 사실은 화이트홀일 수 있다는 것까지 똑같다.


다만, 암흑물질(의 일부)의 정체가 화이트홀일 수 있다는 통찰은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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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관점


나는 수학을 모른다.

그래서 그냥 일반적인 (무식한) 생각을 통해 사고실험을 할 뿐이다.

그런 나는 이런 의문이 생긴다.


화이트홀을 향해 떨어지는 돌은 어떻게 보일까요? 블랙홀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지평선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2장 6절 중)


이 문장은 일견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물리학 관점에서만 그렇다.

로벨리는 시공간의 양자성을 주장하고 있다.

즉, 공간이 무한대로 작아질 수 없는 것처럼, 시간도 그렇다.

따라서 무한대의 시간이 걸리므로 특이점(블랙홀, 화이트홀)의 지평선을 넘어가는 사건을 관찰할 수 없다는 말은 로벨리 본인이 주장하는 시공간의 양자성과 배치된다.


인간이야 (케인즈가 말하는 것처럼)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죽는 존재이니, 그런 현상을 관찰하지 못하겠지만, 물리학은 그런 서사가 아니다. (그런 서사라면 빅뱅도 동화일 뿐이다.)

HAL9000이든 어떤 다른 존재이든, 아주 긴 시간을 관찰에 할애할 수 있는 존재를 가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


(사족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양자 도약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평선을 건너는 시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특이점 지평선 너머의 사건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서, 유한한 관찰자라서 그런 것이다.


나는 또, 로벨리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로벨리의 책 쓰는 속도를 감안하면, 얼마 안 있어 또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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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나는 이 글에서 이 책의 3장, 즉 시간의 화살을 다룬 부분을 대부분 생략했다.

아무런 내용이 없어서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이야기를 '수조의 물'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는 시간의 화살이 존재하는 이유가, 우주가 아직 평형상태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 문장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빅뱅 이전에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는 이야기와 같다.

당연한, 너무 당연해서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우주가 평형 상태에 도달하면, 당연히 더는 시간의 흐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간, 아니 이 우주의 어떤 존재에게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책의 제3장은 지금껏 읽은 로벨리의 모든 책들 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시간의 화살에 대해서 로벨리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한 이야기로 충분하다고 본다.

평형상태의 우주에 더 이상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이런 뜬금없고 영양가는 정말 1도 없는 이야기를 왜 더해서, 이미 훌륭하고 완전한 자신의 서사를 얼룩지게 하는지, 대체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다정다감한 그의 시적 영감은 충분히 발휘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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