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보이지 않는 여자들, Bitch
진화과학에 성차별적 이론이 만연하다는 (의아한 주장의) 책을 접하고 나서,
사회전반에 성차별이 만연하다는 (당연한 주장의) 책을 연속으로 읽었다.
공통으로, 그리고 또 다르게 느낀 점을 기록해 본다.
루시 쿡, <Bitch>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다. 착취의 진화적 근거는 난자가 정자보다 크다는 사실에 있다.”
도입부에서 저자 루시 쿡은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성차별적인 발언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 반대, 즉 암컷에 대한 공감 발언 아닌가?
모성애에 대해 찬탄하는 다윈의 문장 역시 저자는 성차별의 사례로 거론하는데,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킨스는 암컷이 "착취당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다윈 역시 "어머니가 희생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성착취를 진화과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손힐과 파머의 책, <강간의 자연사>야말로
진화과학을 성차별적으로 이용한 가장 어이없는 사례인데,
루시 쿡은 이 책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다.
손힐과 파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칼 짐머의 유명한 책, <진화>를 통해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칼 짐머는 남자이며, 그의 책 <진화>의 한 챕터는
(다른 유명한 책들, 예컨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처럼) 성선택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고,
바로 그 챕터에서 칼 짐머는 손힐과 파머의 어이없는 책을 신랄하게, 그러나 차분하게 비판한다.
과장은 억지 주장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예컨대, 성별 결정 메커니즘에서 '테스토스테론=남자'라는 공식을 세우고
테스토스테론이 성별 결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지 않으니 진화의 주도권은 수컷에 있지 않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수아비 때리기의 전형이다.
(에스트로젠과 마찬가지로 테스토스테론도 남녀 모두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책의 대전제부터가 허수아비 때리기다.
수컷이 진화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나로서는 지금까지 접해 본 적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주장을 반박하는 책의 가치는 뭘까?
그런 주장을 사전에 방지하는 역할은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성선택이라는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 책 다음에 읽은 칼 짐머의 <진화>에도 이 책에 나오는 사례가 대부분 나온다.
자웅동체, 성전환, 모계사회에 대해 짐머는 한두 가지 사례를 들고,
쿡은 더 많은 사례를 들어 분량을 늘렸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캐럴라인 페레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
쿡의 책이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다룬 반면, 이 책은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을 다룬다.
훨씬 더 체계적이기도 한데, 여성이라는 성이 데이터에 누락되어 발생하는 불합리한 현상을
일상, 노동, 설계, 의료, 공공, 그리고 재난이라는 영역으로 나누어 검토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임상실험에서 여성과 소수 인종이 배제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생각해 왔는데,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예컨대 화장실을 생각해보자.
지금은 남녀 화장실이 동수를 수용할 수 있도록 짓는 것이 법적 요구사항이다.
이전에는 동일 면적으로 평등을 가장했으니, 진일보한 것이다.
책의 저자는 동수를 수용하는 수준 역시 아직 평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자들의 화장실 사용 시간이 평균적으로 남자들에 비해 훨씬 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양반인 것이, 많은 재난 구호소에는 남녀 화장실 구분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의) 전통적인 대피소는 남녀 공용인, 그냥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다. 남녀 화장실도 분리되어 있지 않고 “구석에 양동이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이런 공간에 1000여 명이 대피해 있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 16장)
저자는 맺음말에서, 필요한 변화를 압축적이고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첫째는 보이지 않는 여자의 몸이다.
여자의 신체 특성이 고려되지 않는 설계로 인해 의료적, 건축학적, 기술적 장벽이 발생한다.
약은 독성을 띠고, 선반은 너무 높이 있으며, 공구는 손에 맞지 않는다.
둘째는 여체에 대해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 즉 젠더다.
저자가 서문에서부터 밝히듯, 성차별은 섹스, 즉 자연적 성이 아닌 사회적 성, 젠더의 문제다.
나는 앤절리나 졸리가 프로듀싱한 영화, <브레드 위너>가 이 문제를 훌륭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집안에 성인 남자가 없으면 외출조차 하지 못해 식량조차 구하지 못하는 것이 아프간 여성들의 현실이다.
셋째는 경제 통계에서 무시되는 여성의 무급 노동이다.
가사 노동도 문제지만, 저자는 돌봄 노동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성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에 있어서 돌봄 노동이 가장 심각하다는 것이다.
《더 가디언》이, 만약 당신이 일주일에 39시간 넘게 일하고 있다면 “일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라고 할 때 그 “당신”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에게 “만약”은 없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항상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일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같은 책, 3장)
과장과 억지는 반발을 부를 뿐이다
대전제부터 수긍할 수 없었던 루시 쿡의 책과는 달리,
캐럴라인 페레스의 책은 기억해둘 만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과장과 억지를 사용했다.
2004년 《더 가디언》 에 기고한 글에서 코미디언 샌디 톡스비그Sandi Toksvig는 인류학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했다. 어느 날 여자 교수가 28군데가 표시된 사슴뿔 사진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것은 인간이 달력을 만들려 한 최초의 시도로 추정된다.” 우리는 모두 감탄하며 뿔을 쳐다봤다. “그런데 세상에 어떤 남자가 28일이 지났다는 걸 알려 하겠는가? 나는 이것이 여자가 달력을 만들려 한 최초의 시도라고 생각한다." (같은 책, 맺음말)
어떤 코미디언의 말이지만, 저자는 아무런 첨언 없이 인용하고 있으므로 저자도 동의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28일 주기의 달력이 발생한 이유는 명백하다.
달이다.
그걸 남자는 보지 못하고 여자가 보고 달력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웃자는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주장이든, 차분한 목소리로 전달할 때 더 강력하게 들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안다.
문제는, 대단히 불공정한 어떤 문제를 지적할 때 차분한 목소리를 견지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성차별의 문제는 심각하다.
이 문제를 당사자인 여성이 지적하려 한다면, 격앙된 목소리를 억누르기 쉽지 않을 것이다.
100분 토론이었다면, 격앙된 목소리는 귀가 포착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책이다.
책에서 격앙된 어조는 과격한 표현, 대개 과장법을 통해 전달된다.
인류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눈치 채지도 못하는 성차별을 지적한 <보이지 않는 여자들>,
그리고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진화과학의 성차별적 시각을 지적한 <Bitch>.
두 책은 모두 훌륭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좋은 내용을 차분한 어조로 전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