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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31. 2018

왜 김자홍인가

<스토너>를 읽고 생각해본 <신과 함께>





천만 영화 <신과 함께 - 죄와 벌>에 대해 유명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별 두 개 반이라는 처참한 점수를 줬다. 나도 동감이다. CG밖에 볼 것이 없는 이상한 영화로 재탄생한 <신과 함께>는 원작에서 도대체 무엇을 버린 걸까.

개봉 전 예고편이 나온 시점에서 이미 이 영화에 대해서는 강한 반대 여론이 형성되었다. 주인공 진기한이 빠진 것도 컸지만, 무엇보다 김자홍의 영웅화에 대해 사람들은 반감을 표했다. 원작의 김자홍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어떻게 보면 우리들 대부분을 대리하는 그런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이 지옥의 여러 재판을 거치며 삶을 돌아보는 것이 만화 <신과 함께>의 주 플롯이다. <신과 함께>는 여러 가지 매력이 많은 작품이지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저력은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주인공의 평범함 아니었을까.


평범한 주인공의 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라는 소설이 있다. 중세 풍자극 <만인(Everyman)>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작가의 의지가 보이는 작명에 충실하게, 이 소설은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주인공은 마케팅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거부를 쌓았고, 결혼을 세 번 했으며, 패션모델들과 밀회를 즐긴다. 이래서야 일반 독자들이 주인공의 삶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을까? 그런 대단한 사람조차 결국 죽음 앞에는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몰라도,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너무나 비범해서 일반 독자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최근에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었다. 1800년대 말 태어나, 양차 대전을 살다 간 한 대학교수의 이야기다. 1965년 발표된 소설이지만, 작가조차 사망하고 난 요즘에야 빛을 보고 있다. 영국 서점 체인 워터스톤즈가 선정한 2013년도 '올해의 책'이다. 발표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난 이 소설이 지금에 와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비결이 주인공의 평범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함이 부각되는 시대사조는 인터넷과 모바일 보급에 의한 정보 접근권 평등화에 따른 결과다.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최소한의 교육을 받고 밭에서 일한다. 그런데 근처 도시에 대학이 생기고, 아버지는 최신 농법을 배우라면서 아들을 대학으로 보낸다. 그런데 세상사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 아들은 대학에서 교양 과목을 듣다가 영문학에 푹 빠져버리고, 전공을 바꿔버린다. 한 교수의 격려에 힘을 얻은 그는, 아들을 데리러 졸업식에 나타난 부모에게 도시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냥 평범한 교수의 평범한 삶에 불과하다.

이 소설은 주인공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대학교수 스토너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교수였으며, 그의 사망은 별다른 뉴스가 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살다 간 사람이라는 말로, 작가는 소설을 시작한다.

평범한 삶이라고 사건이 없지는 않다. 단지, 어디서나 들어봄 직한 고만고만한 사건들이다. 아내와의 불화, 직장 내 정치, 불륜, 때때로 작은 기쁨,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 이 정도다.






어느 날 원거리 전화로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들은 스토너는 장례식을 치르러 고향에 간다. 삶의 의미를 잃은 어머니까지 사망하면서, 스토너는 부모님의 무덤을 마련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대학교수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 이후, 집과는 사실상 연을 끊고 살아온 그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과연 아무 느낌이 없었을까.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드라이한 서술은, 스토너라는 평범한 사람이 부모님에 대해서만은 얼마나 이기적이 될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부모님께는 얼마나 이기적이 되는지, 우리들은 잘 안다. 여기에서 <신과 함께>의 김자홍을 돌아보자. 불효 죄를 재판하는 한빙지옥에서, 김자홍은 자신이 그동안 별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못을 부모님 가슴에 박아왔는지 깨닫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짓는 수많은 죄, 그것이 <신과 함께 - 저승 편>의 주제다. 영화는 원작의 핵심 주제를 아주 용감하게 무시해버렸다.



<신과 함께 - 저승편> 제1권 표지. 영화로 바뀌면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 중 하나는 사라졌고, 다른 한 명은 무지막지한 변신을 했다.




부모님의 시골집을 처분하고 나서 흑인 일꾼에게 집 판 돈 일부를 나눠주는 장면을 보자. 스토너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흑인 일꾼은 법적으로 그 집에 대해 아무 권리도 없다. 하지만 이제 일자리도 잃게 된 그 일꾼에게 한 푼도 나눠주지 않고 내쳐버리는 것은 소심한 일반인에게 무리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그런 타협은 이미 그의 성격 자체에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는 거울상

<스토너>는 읽는 도중에 별 감흥이 없다. 평범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고 난 뒤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든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의 연장선에서 이 소설을 보게 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평범한 삶의 비범한 순간을 드라이한 필치로 담아낸다. 예컨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 그리는 사건은 분명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지만, 평범한 이들의 삶에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런 사건이 연속되는 삶이라면 그건 이미 비범한 삶이지만, 그런 사건이 한두 번에 그친다면, 그건 여전히 평범한 삶이다. 그런 삶을, 단편이 아닌 장편이라는 길이로 그려낸 것이 <스토너>라는 생각이 든다.




Goodreads.com에서 4.29라는 무시무시한 평점을 자랑하는 <스토너>. 이 사이트에서 어떤 이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은 이야기로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 작품의 대단함이라고 말한다. 과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일까.


세상에 평범한 삶이란 없다. 다른 이의 눈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삶이라도, 당사자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어떤 평범한 이의 삶을 그린 작품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 거울 속에 비칠 때의 공포. 자신을 보여주는 그 무서운 힘이 <스토너>의 울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5천만 인구에 천만 영화는 분명 대단한 쾌거다. 그런 쾌거를 달성하기 위해서, 영화 제작진은 미국산 블록버스터에 밀리지 않는 CG를 핵심 무기로 장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평범함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무서운 각성의 힘을 생각하면, 원작 만화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쪽이 더 큰 감동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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