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 대학교, 스펜서 미술관
오후에 잠깐 학교 미술관에 들렀다. 학과 직원 중 한 사람인 조리(매거렛의 애칭이란다)가 괜찮으니 한 번 가보라고 해서 갔다. 대부분 현대 미술이지만, '모네'가 있다고 해서 나름 기대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네'는 없었다. 작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도 작은 데다 컬렉션도 기대 이하였다. (모네의 수련 한 점 정도 있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내 기대의 거의 전부다.) 미술관 홍보 포스터에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가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소장 미술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 그림이 유명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가 그나마 가장 알려진 화가라는 것이다.
사실은 로제티보다 훨씬 유명한 쿠르베가 한 점 있었지만, 매우 평범한 풍경화인데다가 크기도 매우 작았다. 쿠르베는 대작으로 유명한 작가 아닌가? 가까이 가서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그림이었다.
그림은 불의를 세상에 알리는 일도 한다. 다비드, 고야, 피카소가 그러했고 사회주의 화가들에게는 그것이 주된 과제였다. 아래 그림은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미국이 예전에 저지른 끔찍한 행위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캔자스 주를 위해서 남북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포니족 전사들의 유해를 고향에 돌려주는 대신, 미국 정부는 원주민 뇌구조를 연구하겠다고 목을 베어 가져가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벙키 에코혹(Bunky Echo-Hawk)이라는 1975년생 포니족 화가가 화폭을 통해 이 사건을 고발한 것이 위의 그림이다. 2011년 작품이며, 제목은 '귀향(Homecoming)'.
나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정치가 아니라 인권에 관한 것이라서, 그림 자체는 아름답지 않지만 그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처럼 정치적 의도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시킬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충격의 강도는 이런 생경한 그림 쪽이 더 확실한 편이다.
컬렉션이 매우 허접하기는 해도, 미술관 자체 건물도 아름다운 편이고, 레이아웃은 매우 훌륭하다. 원래 현대미술이라는 게 레이아웃 없으면 뭐 볼 것도 없지 않은가? (내 편견이다. 하지만 버리지 않을 편견이다. ㅋㅋㅋ)
현대미술이 아닌 미국 미술이야 뭐 볼 것도 없...다는 편견이 있지만, 그래도 뭐 볼만 한 것을 만나기도 했다. 아래 그림의 제목은 <질투하는 연인과 외로운 푸른 산의 발라드>. 제목이 뭔가 그럴 듯 하다? 토마스 하트 벤튼이라느 미주리 출신 화가의 그림이다.
그냥 경치를 그린 그림도 얼마든지 예쁠 수 있다. 그런 그림은 많기도 한데 왜 내게는 한 개도 없을까. 작가는 뭐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미국 화가다. 1867년 그림이다. 그러니까, 세상 어딘가에서는 미술의 대혁명이 벌어지고 있을 때, 뉴욕 출신의 어느 화가는...
레이아웃으로 예술이 된다느 걸 아래 큐레이션이 보여준다.
왼쪽은 현대미술가(프랑스 출신이었던가?)의 전위적 작품, 중간은 현대 중국 미술가의 디지털 수묵화, 그리고 오른쪽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실제 불상이다. 다른 시대, 다른 생각으로 만들어진 세 가지 물건의 배치가...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