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나온다던데 그 절반 이상은 돈 때문이고 단언한다. 왜냐? 지금의 내가 그 망할 놈의 돈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니까. 스튜디오 사정이 어렵다는 핑계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퇴직금 대신 실업 급여를 받는 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이미 지난 선택이지만 그래도 퇴직금이 아른거리긴 하더라.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퇴직금은 오백이고, 실업급여는 구백이다.
단순한 숫자로만 봤을 땐 실업급여를 선택하는 게 맞지만…… 아쉽게도 나는 자발적 의지로 퇴사를 했기에 실업급여 대상자가 아니다. 물론 노사가 입을 맞춘다면 부정수급을 할 수 있다만 뒤가 구리다. 구린 일은 하지 않는 게 맞다. 적어도, 적어도 지금까지의 나는 떳떳하게 사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나는 이십구 년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군대에서 보급병이었을 때, 침낭을 불출할 때 선임이라도 먼저 주지 않았고, 친하다고 먼저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선임들에게 밉상이었다.
퇴직금만 받으면 웃으면서 잘 마무리할 수 있는 건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실업급여를 선택하든, 못 받은 퇴직금을 위해 노동청을 선택하든 좋은 선택지가 없다. 문제는 선택은 나의 몫이고 책임도 나의 몫이라는 것. 퇴직금을 받을 경우 스튜디오와는 웃으면서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실업 급여를 받자니 남은 생을 부끄럽게 살 것 같았다. 참 어려운 고민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안겨준 실장님 당신이 정말 미워지는 날이다.
몇 날 며칠을 심도 있게 고민하고 싶었으나 실장님께서 보채셨고, 결국 나는 남은 생의 떳떳함을 위해 실업급여 대신 퇴직금을 골랐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계산한 건 500만 원인데 실장님께선 200만 원을 말씀하시더라.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여쭤보니 실장님께서 세금신고를 할 때 기존 월급대로 신고하지 않았고, 100만 원으로 신고하셨단다…….
아아, 종종 현금영수증을 발급해 주는 모습을 보며 당신들은 깨끗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어딜 가나 탈세가 범람하는 세상이다. 노동청까지 가면 어떻게든 받을 수 있는 돈이지만 탈세에 나까지 엮였다. 실장님께선 월급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자신의 소득보다 덜 신고하는 건 탈세고, 퇴직금은 줄어들 수 있다 이런 걸 단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저 믿고 알아서 해달라고 했는데 후회된다. 이제 와서 내가 했던 어리석은 행동이 내 발목을 잡는다. 아아, 나는 실장님이 당신이 정말, 많이, 매우 원망스럽습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언제나 손해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예전에 세계 과자집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도 사장님께서 힘들다며 주급을 네 번 미뤘고 결국 잠수를 탔다. 지금 생각하면 당장 그만두고 노동청에 신고했어야 했는데 어린 맘에 그러지 못했다. 혼자 끙끙 앓았을 뿐. 그때 이후로 칠 년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돈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 웃긴 건 퇴직금이나 월급은 분명 내 권리인데 내가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 왜 이렇게 등신처럼 행동하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이런 건지 혹은 내가 어리숙해서 그런 건지. 재밌는 건 법까지 가면 없었던 돈이 생긴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는가?
이제 저울이 바뀌었다. 퇴직금 500 vs 실업급여 900이 아니라 퇴직금 200 vs 실업급여 900이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실업급여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떳떳한 선택 퇴직금을 골랐다. 실장님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직금을 받겠다고 말씀드리고 잠시 후 연락이 왔다.
"다들 퇴직금보다 실업급여가 더 많이 나와서 실업급여를 선택하는데 왜 퇴직금을 골라요? 우리 세무일 보시는 분도 융통성 없다고 하시네."라고 하시더라. 융통성……. 모르겠다. 태생이 이런 걸 어떡하라는 건지. 나는 떳떳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떳떳하게 살고 싶다. 융통성이 없는 거북이처럼 살면 어떤가? 적어도 나 자신한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고, 된다면 내 사람들한테도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정도를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거면 되는데…….
이번만,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처음의 선택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면 쉬워지는 게 사람이다. 지금 내가 법을 어기면 미래의 나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어길 것이 물 보듯 뻔했기에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했다.
#
애초에 제대로 세금신고를 하고 퇴직금을 주면 끝날 일인데 왜 이렇게 골머리를 썩어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