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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버그 Mar 12. 2020

블록체인은 거품일까?

#4 블록체인 업계에서의 1년 반

지난 회사에서 퇴사한 지 딱 1년이 되었다. 회사는 가상현실에서 시작해 블록체인으로 피봇을 한 스타트업이었다. 수익은 난 적이 없으며 투자금으로 수년간 운영되고 있다.


입사한 지 3개월 뒤에 블록체인으로 피봇을 했는데, 그럴 줄 알았다면 나는 결코 발을 들이지 않았을 거다.


1. 회사가 블록체인으로 피봇을 한 진짜 이유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다. 가상화폐 붐이 한창이던 2017년 겨울, 회사는 ICO(Initial Coin Offering)로 꽤 많은 돈을 투자받았다. ICO는 아직 서비스가 없는 상태에서 회사 자체의 가상화폐를 만들어 발행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우리의 가상화폐를 쓸 수 있는 제품을 곧 만들건대 그러면 이 가상화폐의 가치는 무한대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설득해 지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가상화폐를 일정 금액에 팔아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투자금이 모이면 개발을 시작하는 IR 혹은 크라우드펀딩과 비슷하다.


2. 회사도 모른다. 이 사업의 미래를.

ICO를 위해 공개하는 서비스의 컨셉은 보통 아주 매력적이다. 나 역시 그 컨셉에 매료당했고 실력 좋은 개발자들을 매우 믿었기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ICO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문제는 서비스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지였다. 막상 개발 단계에 진입하니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혔다. 블록체인 기술은 아직 매우 초창기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경영진들조차 어떤 방향으로 이 서비스를 이끌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결국 서비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기 컨셉에서 많이 벗어나 더 현실적인(=매력 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회사는 가상현실에서 미래를 보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VR 하드웨어의 더딘 발전으로 빠르게 VR을 접고 블록체인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 역시 아직 한계가 많기 때문에 경영진들조차 어떻게 기술이 발전하고 시장이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잘 하는 건 단지 존버, 그리고 수많은 다른 프로젝트들을 동시에 벌리기 뿐이었다.


3. 개발자들에겐 분명 좋은 기회다.

블록체인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실현만 된다면 분명 좋은 기술이다. 개발자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며 스스로를 성장시켜나갈 수 있다. 그리고 만들어야 할 서비스들이 분명히 있기에 기획에 따라 차근차근 개발해나가면 된다.


4. 하지만 마케터는?! 서비스, 제품이 없는 상태에서 홍보를 한다는 것.

나 같은 마케터들에게 블록체인은 상당히 다르게 다가온다. 우선 서비스, 제품이 없는 상태에서 홍보를 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나 역시 ICO 초반에는 분명 회사가 이런 서비스를 만들겠지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열의를 갖고 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형의 서비스를 홍보하는 게 한계가 있었다. 


회사는 생존하기 위해 계속 다른 일들을 벌였고, 빠르게 제작해서 내놓은 서비스들의 퀄리티는 당연히 좋지 않았기에 시장 반응도 안 좋았다. 그러면 또 빠르게 그 서비스를 철수하고 다른 서비스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의 출시를 동시에 준비하고 대응하느라 체계적으로 일한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리뷰할만한 데이터들조차 모이기 전에 서비스를 접었기에, 그때그때 던져지는 온갖 잡일들만 처리하다가 끝난 것 같다.


5. 마케터가 아닌 커뮤니티 관리자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서비스의 투자자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시의적절하게 뉴스를 만들고, 회사의 현 상황을 공유하는 거였다. 뭐, 크게 본다면 커뮤니티를 관리하는 것 역시 마케팅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비스가 개발되려면 아직 한참 많았으니 사실상 무의미한 컨텐츠들이 많았다. 또한, 커뮤니티의 피드백을 다이렉트로 받는다는 건 스트레스 폭발하는 일이었다. 서비스가 계획대로 차근차근 개발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뜻대로 진행되는 일들이 많이 없었기에 전달하는 입장에서는 힘들 때가 많았다.


개발자들처럼 내가 하는 일에 차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경영진들의 눈치를 보게 되기 시작했고 스트레스는 더 쌓여갔다. 계속 바뀌는 회사의 방향성에 휘둘리기만 하고 나의 목소리는 내지 못했던 건 내 한계이기도 했다. 이 상황을, 이 산업을 보다 큰 시야로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6. 우여곡절 끝에 공개된 서비스의 퀄리티가 부끄러운 수준일 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우리 서비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공개된 베타 버전의 서비스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엉성하고 별로였다. 특히 경쟁이 매우 치열한 분야의 서비스였기에 퀄리티가 매우 좋지 않은 이상 유저들의 관심을 금방 잃을 수밖에 없었다.


직원이 서비스에 애착이 없는데 어떻게 서비스가 잘 될 수 있을까?



실체가 없는 건 믿기 어렵다. 나는 결국 '탈' 블록체인 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업계에는 블록체인의 가능성을 믿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통해 블록체인이 언젠가는 우리 삶에 진정한 혁신을 가져다주는 기술로 실현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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