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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Feb 28. 2017

2월의 Morgan (1) 에밀리 디킨슨 특별전

2017.2.24

모건 라이브러리에서 5월까지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특별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벼르고 있다가 지난 금요일 저녁(7시부터 9시까지 입장 무료)에 다녀왔다. 3월 3일 다음 주 금요일 오후 1시에 Gallery Talk 행사가 있으니 뉴욕에 있다면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1층에서는 재즈 트리오 밴드가 Shadow of Your Smile을 연주하고 있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에밀리 디킨슨을 사랑하는 많은 미국인들이 2층 전시관을 채우고 있었다. 디킨슨의 문학 세계를 만끽한 이후에는 프랑스 상징주의 작가전에 잠시 들렀다. 


# 1. Life & Poetry of Emily Dickinson


에밀리 디킨슨의 유일한 사진. 16세 때로 추정?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에 서부 매사추세츠 지역의 소규모 대학도시 애머스트(Amherst) 중심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하면서도 자녀교육에 열정적이었다. 디킨슨 시대에는 이미 소녀들의 초등교육이 드물지 않았고(국내 사이트 등지에서는 not uncommon을 흔하지않다고 반대로 번역해놨다), 그녀는 애머스트 아카데미에서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의 시의 세계에서는 유년시절과 자연에 관한 유대감을 많이 볼 수 있다. 

디킨슨은 그의 할아버지가 공동 설립하고 아버지가 1835-1873년 동안 이사직을 역임한 애머스트 컬리지의 그림자로 전 생애 동안 살았다. 작은 학구적인 마을에서의 삶, 이런 지적으로 자극적인 환경 속에서의 삶은 그의 서신과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Otis Allen Bullard (1816-1853) Emily Elizabeth, Austin, and Lavinia Dickinson, Oil on canvas, 1840


아 이것은 정말 못 그린 디킨슨 남매 초상화...(안습) 세 사람 얼굴이 다 똑같고 기괴하기 까지. 그렇지만 남겨진 작품이 명작이든 아니든 그것이 가진 역사적 의의나 가치는 화가의 실력과 무관할 때도 있다. 왼쪽이 에밀리(9세), 중앙이 그녀의 남자 형제 오스틴, 그리고 여동생 라비니아. 8세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식물도감을 들고 있는지 아니면 표지가 꽃인 다른 책을 들고 있는 건지 확실치 않으나 이 초상화는 디킨슨이 향년 55세(1886)로 사망하기 전까지 지속된 형제자매와의 돈독한 우애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수많은 편지가 오고 갔던 오스틴과의 관계에서 에밀리의 강렬한 애착이 보이는데 동시에 그녀가 dream girl이라고 칭할 정도인 아내 수잔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디킨슨에 관련한 책들을 보면 그가 동성이나 양성애자였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수잔과는 의문이 있지만 오스틴과의 관계는 인간적 유대감인 것으로 보인다. 2미터 정도 되는 키가 무지무지 큰 남자 친구(이름 까먹음)에게 주었던 편지, 에밀리가 만들었던 식물도감, 에밀리의 학교 선생님이 컷 페이퍼 실루엣을 만든 작품, 그리고 당시에 우정 표현법 중 하나였던, 에밀리가 친구에게 보낸 붉으스름한 자기 머리카락도 전시되어 있었다.



House와 Home 
집과 가정에 대한 관념,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명상이 디킨슨의 문학의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집에 대한 시는 집처럼 생긴 종이 위에 쓰였고(아래 "The way Hope builds his House (1879)"), 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매우 자그마한 묘비석이 편지지(위 "Soul, take thy risk (1867)") 반대편에 그려져 있었다. 

 

디킨슨의 낙서는 생애 통틀어 이제껏 아래 하나밖에 발견되지 못했지만, 이를 찬찬히 뜯어보면 상당히 통제되고 능숙한 솜씨를 보인다. 분명 드로잉 습작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샬럿 브론테처럼 필체나 낙서의 크기는 굉장히 작았다. 






A Narrow Fellow in the Grass. - The Snake


디킨슨의 원고들을 보다 보면, 그가 ‘여류작가’로서 문학적인 소셜 네트워크와 후원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꺼려했던 이유에 대해 조금은 납득이 가기도 한다. 저명한 편집인인 Samuel Bowles와 Thomas Niles, 그리고 문학적 멘토인 Thomas Wentworth Higginson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예로 Bowles가 디킨슨의 출판을 진행하려고 스프링필드 리퍼블리칸(1860)에서 편집인 F. H. Cooke을 고용했을 때, 결국 디킨슨의 아버지와 그녀가 존경하던 다른 인물들의 반대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1,789편의 시 중 단 열 편만이 디킨슨이 살아있는 동안에 출판이 되었으나, 언제나 시나 구두법이 수정되고 난 이후였고 그의 이름은 전혀 작가로 언급되지 못했다. 이 익명으로 신문에 실린 시들은 아마 그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왼쪽이 필사 초본이고 오른쪽은 그 이후 수정한 시인데, 후기의 디킨슨의 필체는 알파벳 숫자 하나하나가 떨어져 있는 모양새이다. 디킨슨은 구두법 중 대시(dash: 영문법 구두점 punctuation 중 부연 설명하는 기능을 하며 두 단어를 붙여 새로운 낱말을 형성하는 하이픈 hyphen - 과는 다르다. 대시가 좀 더 길고 얇으니 영작을 하거나 그래픽 디자인을 할 때 구분해서 써야 한다.)를 애용한다. - 옆 매거진에 올려놓은 그의 시 'I'm nobody. Who are you?'만 보아도 확연히 드러난다. 


 

Elizabeth Browning

전시장의 꽃 벽지에 대해 생각이 든 것은, 물론 여류시인이라는 것을 떠나서 개인적으로도 아름답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 벽지가 당시 에밀리 디킨슨이 살았던 시대에 유행한 풍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화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에밀리 디킨슨이 식물학 수업을 들었을 당시 꽃과 식물에 매우 빠져 있어서 식물도감을 만들었다지만, 월트 휘트먼의 특별전이라면 꽃 벽지를 썼을까 하는 의문. 어쨌든 사실 이 디자인은 디킨슨의 침실에 있던 꽃 벽지가 맞다. 사진은 디킨슨이 롤모델로 삼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며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샬럿 브론테의 첫 소설이 1847년 10월 런던에서 출판되어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음 해 미국판 초판본이 발행되었다. 디킨슨은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인 Elbridge Bowdoin의 책을 빌려 읽었기 때문에 영 미판 중 어떤 판본으로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책을 읽고 돌려줄 때 이런 메모를 남겼다. "만약 이 모든 책장들이 하나하나의 제단이고 Currer Bell(당시 브론테의 가명)을 구원해달라고 비는 기도자라고 한다면, 신으로서의 당신은 답하실 건가요?" 그들은 종종 책을 나무상자에 넣어서 디킨슨의 정원 덤불에 놓아두고 서로 교환해서 읽었더랬다.



에밀리 디킨슨은 1886년 5월 15일 자택에서 간경화/간암 등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18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생전에는 그중 10여 편만 발표되었으며 100여 편은 지인들 사이에서 돌려 읽혔다. 그러나 모든 시들은 자신이 만든 수제 원고 부클릿 안에 다발로 모아 두고 있었으며 사후 그의 동생 라비니아에 의해 1100여 편이 발견되었다. 라비니아는 오빠 오스틴의 아내이자 에밀리의 둘도 없는 친구 수잔 디킨슨과의 논고 끝에 시들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했으나, 진행상황은 매우 느려서 결국 그 원고들은 오스틴의 정부 메이블 토드(Mable Loomis Todd)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토드는 그의 남은 생애를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편집하고 출판하는 것에 바쳤다. 처음 두 권의 책은 시인의 오랜 문학적 멘토인 토마스 히긴슨과 공동 편집을 하였다. 400편 이상이 디킨슨이 사망하고 10년 이내에 출판되었고 이내 강렬하기 그지없는 그의 문학적 명성은 빠르게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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