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언어에 대한 관찰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파면을 선고했다. 사건의 중대함만큼이나 이 판결은 언어적으로도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대통령이라는 국가 최고 권력자를 파면시키는 판결이, 감정이나 선동 없이 단정과 설명만으로 이루어진 점이 특히 그렇다.
오늘의 판결문은, 내용과 더불어 표현 방식 역시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한글이라는 언어의 구조적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
판결문과 같은 공식적인 글은 감정을 억제하고 논리만을 남기는 문장이어야 한다. 오늘의 판결문 역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이 전달되었다. 이 효과는 단순한 문장력의 결과가 아니라, 한글이라는 언어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1.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문장의 핵심이 ‘끝’에 오는 구조
한글은 주어-목적어-서술어(SOV) 어순을 가진다. 이는 판단이나 결론이 문장의 끝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이 구조는 듣는 사람에게 판단을 유보하게 하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피청구인은 국회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으로 민주주의와 조화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청자는 문장의 흐름을 따라가며 정보를 축적한 뒤, 마지막 어구에서 판단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문장 배열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를 정리하는 리듬 자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설득 구조로 기능한다.
반면 이 문장이 영어로 쓰인다면 주어-동사-목적어(SVO) 구조를 따르게 되며, 핵심 판단이 문장 앞에
위치한다.
예를 들어,
“It is difficult to say that such actions are compatible with democracy.”
이 문장은 명확하지만, 청자의 생각 흐름을 따라가기보다는 판단을 먼저 제시한다. 이 차이는 설득보다는 정보 전달에 탁월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물론 영어문장의 예시는 정교하게 다듬어 쓰인 문장이 아니다.)
2.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문장 어미
한글 문장은 어미 특성상 판단을 내릴 때도 예의를 갖춘 것처럼 보인다. “~입니다”, “~한 것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등의 종결어미는 단정적이지만 공격적이지 않다.
영어의 “The respondent violated the Constitution.” 같은 표현은 [그 피청구인은 / 위반했다 / 헌법을]이라고 직역할 수 있고 표현이 단호하지만 감정적 거리감이 생긴다.
반면, 한글은 정중함 속에 판단을 실어 전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어미 구조는 법적 판단, 공식 발표 등에서 모두 ‘겸손한 동시에 확신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다.
3. 이유를 먼저, 판단은 나중에 – 사고 흐름 중심의 구조
한글 문장은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을 먼저 제시한 뒤 문장 맨 끝에서야 핵심 주장—‘하였어야 합니다’—가 등장한다. 독자는 문장을 따라가며 맥락을 이해하고,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그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피청구인은 국회의 권한 행사가 다수의 횡포라고 판단했더라도 헌법이 예정한 자구책을 통해 견제와 균형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였어야 합니다.”
이 구조는 청자의 이해를 전제로 한 흐름이며, 판단은 설명 뒤에 따라온다.
영어는 대체로 결론을 먼저 서술하고 이유를 나중에 붙인다:
“The respondent should have ensured that checks and balances were maintained through constitutional self-corrective mechanisms, even if they regarded the exercise of parliamentary authority as a tyranny of the majority.”
영어는 주어와 동사, 즉 ‘누가 무엇을 해야 했는가’가 문장 초반에 등장한다. 그 뒤에 ‘왜 그런 판단을 했든’은 종속절로 덧붙여진다.
두 언어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주장에 이르는 길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영어는 핵심 주장을 앞세우다 보니 정보는 명확하다는 특성이 있고, 사고의 흐름은 귀보다 눈에 더 적합하다.
이 구조를 보다 보니, 한 가지 생각에 머물게 된다.
한글은 ‘귀로 따라갈 수 있도록 설계된 언어’다. 정보는 말하듯 순차적으로 쌓이고, 판단은 끝에서야 도달한다. 듣는 이가 놓치지 않도록 문장 리듬이 구성되어 있다.
영어는 문장의 구조적 설계와 논리적 우선순위를 따라 ‘찾아 읽는' 언어라 할 수 있다. 결론은 앞에, 설명은 뒤에 따라온다. 핵심 언어를 먼저 만나고 그 이유를 뒤에 찾아들어가는 식이니, 사고의 흐름이 눈에 더 적합한 것이다.
물론 ‘manifest’나 ‘reboot’처럼 영어 키워드 하나로 개념을 응축해 전달가능한 특성 때문에 브랜드 언어 자산 구축 시 영어키워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문장 구조와는 별개로, 단어 자체가 함축하는 조형성과 리듬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읽는 언어’와 ‘듣는 언어’의 차이는, 문장의 흐름 속에서 정보가 어떻게 조립되고 전달되는가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다.
브랜드 언어 자산 구축에서 한글이 가지는 힘
브랜드도 무엇을 말하느냐를 넘어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도달할 때 정체성이 완성된다. 언어의 구조는 브랜드의 태도를 만든다. 그렇다 보니 브랜드 정의 혹은 브랜드 스토리 등의 속성을 표현할 때 한글이 가지는 구조가 적합한 태도를 제시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판단을 강압하지 않고, 설명을 앞세우기에 자연스럽게 설득을 유도한다. 감정 없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배제한 채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
오늘의 헌법재판소 판결문은 바로 그 한글의 특성이 드러난 공적 언어의 사례다. 한 나라의 법적 결정을 구성하는 언어가 어떤 리듬으로 말을 하고, 그 리듬이 공동체 전체를 어떻게 설득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판결문은 흔히 자기 계발서가 말하는 ‘감정 없이 말하는 기술’과는 다르다. 갈등을 줄이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아니라, 국가의 판단이 기록되는 자리에서 감정을 제거한 채 쓰인 문장, 즉 공적 언어의 태도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활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기로 느껴졌다. 큰 혼란을 끝맺는 방식이 일상의 언어였다는 사실이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생각은 브랜드 언어 자산 구축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브랜드가 지정하는 언어는 그럴듯한 표현에서 그쳐선 안 된다.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감정과 사고에 책임지는 일이다. 그렇기에 브랜드의 언어 역시, 믿음과 판단이 깃든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 본문에서 언급한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 결정문 전문은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