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든 뭐든 지향할 건 있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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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연스러움이란 단어에 꽂혀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러움이란 주어진 환경 속에 적응하여 가장 최적화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문제에는 항상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자연스러움을 지향하고 산다. 뭔가를 지향하는 건 본능에 가까워서 그런지 바뀌진 않았지만, 지향점이 바뀌었다는 건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곱씹다보니 자연스러움의 관점으로 세상의 다양한 콘텐츠를 찾아보게 된다. 특히 오늘 보게 된 삼국지톡에서는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비유를 들어 소개하고 있다. 권력이란 물과 같다. 고랑 따라 질질 흐르다, 파인 곳 있으면 고여드는, 게으르고 자존심도 없는 물! 엉망진창인 물길을 아무리 열심히 정리해도, 강물은 수백, 수천 년간 흐르던 모양대로 돌아가지. 습관이 이래서 무서운 거야.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는 건 어쩌면 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물처럼 이세상에서 가장 최적화된 형태는 없을테니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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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 얘기가
더 재미있는 이유
요즘같이 내가 원하는 분야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언제 있었나 싶습니다. 유튜브가 유행함에 따라 각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가 유튜브에 쏟아져 나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역사 이야기 콘텐츠를 듣는 걸 참 좋아하는데요. 하나의 사료를 놓고 각자만의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게 재미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긴 했지만 억지로 뭔가를 암기하는 건 싫어하다 보니,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화로 배우는 역사, 혹은 이야기로 배우는 역사는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역사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했기도 합니다.
삼국지 아저씨로 유명한 임용한 박사님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습니다. 세종대왕 업적의 정수가 [4군 6진 개척]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는데요. 영상을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동의가 됩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전쟁을 일으키려면 충분히 국력을 갖고 있어야 하죠. 전쟁 중에서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까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임용한 박사님은 자신의 전공이 전쟁사가 아니시지만, 역사 속에서 배웠던 다양한 이야기를 늘 [전쟁]의 관점으로 풀어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어쩌면 전쟁이니, 전쟁의 관점으로 역사를 풀어내는 방식이 가장 와닿는 방식이라서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교과서로 배웠던 역사가 뭔가 딱딱한 느낌이 든다면, 임용한 박사님의 강의는 과연 그럴 법하다는 느낌을 통해 재미를 줍니다. 여기에서 그럴듯하다는 것, 그럴 법하다는 것, 그러할 연(然)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와 이야기로 배우는 역사는 왜 차이가 날까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과서는 우리가 어떤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교과서를 쓴 사람의 시각을 담아 취사선택하여 제시합니다. 좋게 말하면 후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배울 필요가 있는 역사를 추려서 제시하는 것이죠. 역사는 역사 속에 존재했던 위대한 사람의 정신을 본받고, 악한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정답을 미리 정해놓고 역사를 거기에 꿰맞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요.
그래서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는 재미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역사 속에 기록된 일면만으로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여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세종대왕을 위인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세종대왕을 혹독한 상사로 기억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에서는 한 가지 면을 다룰 수밖에 없죠. 시험에 써야 할 정답을 정해두어야 하니 말입니다.
또한 수업 시간에 듣는 역사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파편적인 사건을 모아 가르칩니다. 마치 고고학자가 된 것처럼 파편화된 지식을 암기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죠. 아무래도 긴 시간의 이야기를 몇 가지 키워드로 압축해야 하다 보니, 중요한 것들만 훑고 지나갈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한때 시험에 나오는 것만 공부한다는 컨셉의 책이 엄청나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시험 중심의 책은 아무래도 지식을 파편화시켜 놓고 암기시키는 형태로 진행되죠.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교과서를 달달 암기하는 건 과연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비록 저는 암기하는 걸 싫어했지만, 교육하는 단계에서 암기는 필요불가결한 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뭐라도 머릿속에 들어가는 게 있어야 그걸 응용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암기가 필요하다면, 기왕이면 더 쉽게 와닿게 만들어서, 암기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야든 직관적으로 만들면 암기도 쉬워지는 법이니까요. 이러한 차원에서 역사의 사건을 토대로 연결고리로 연결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로 제시하는 교육 방식을 저는 좋아합니다.
지식을 파편화시켜 놓고 암기시키는 방식은 시험 대비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기는 어려울 겁니다. 막장 드라마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까닭은 알고 보니 A가 B의 아들이었다는 형태의 [연결고리]를 제시하기 때문이죠. 막장 드라마가 늘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재미라는 차원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결고리]가 사라진 역사는, 다시 말해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지식은 그저 학습자에게 고통만 낳는 게 아닐까 싶네요.
임용한 박사님이 말씀해 주시는 역사 이야기 중에서 재미있던 순간을 생각해 보면, 상상력을 자극해 주실 때였습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냥 그랬나 보다 하고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과연 정말 그랬을까? 왜 그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만약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등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파편화된 형태로 남아있던 지식이 어떻게든 얼기설기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집니다. 저는 여기에서 역사 공부의 재미를 느꼈던 것 같네요. 이렇게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시각을 통해 역사가 이야기로 재구성되지 않았더라면, 역사 이야기는 재미없는 것이라며 손사래를 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중국 고대 역사인 삼국지를 [정사 삼국지]로 처음 접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나관중의 소설, [소설 삼국지연의]를 각자의 관점에 맞게 각색한 소설/만화/웹툰/영화/드라마/게임으로 접한 사람이 많겠죠. 특히, 만화/영화/게임으로 삼국지를 처음 배운 사람들은 화려했던 장수들의 무쌍, 말 한마디에 10만 군대를 쥐락펴락하는 계략, 자기 군주에게 보여주는 변함없는 충성과 의리 등에 감동/감화/감탄하면서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설 삼국지연의 이야기는 실제 정사 삼국지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다고들 합니다. 왜 민중들은 정사 삼국지와 다른 이야기, [소설 삼국지연의]에 열광했을까요? 역사에서는 민중이 생각하는 정의, 통쾌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소설에서는 느껴졌기 때문이겠죠. 민중이 원하는 목소리를 담아 재미있게 요리된 소설을 통해, 원재료가 되었던 무미건조하게 파편화되어 서술된 [정사 삼국지]도 인기를 끌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연결고리, 비하인드 스토리가 재미없는 역사를 재조명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교과서 밖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때, 비하인드 스토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되는 건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만드는 [연결고리] 때문이라고 감히 확신해 봅니다. 사실과 진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럴싸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생기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주어진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모든 창작자의 고민이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요?
1.
열심히 배운 정석은
언젠가 잊어 버려야
앞에서 교과서 무용론을 편 것 같아 교과서가 잘못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긴 것 같은데요. 어느 분야든 교과서를 공부하는 건 중요합니다. 교과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있던 경험, 노하우, 시행착오를 모아 가장 효율적인 형태인 정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남이 만든 정석적인 방식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발전을 이뤄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선 어떤 분야든 정석을 익히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정석의 큰 줄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잊어버려야 나만의 정석이 나오는 법이죠. 어떤 분야든 나만의 정석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그때부터 비로소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전개가 비슷합니다. 어떤 분야든 정석이 만들어지는 건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죠. 딱히 이유는 몰라도 다들 그렇게 쓰다 보니, 정석으로 굳어집니다. 쓰임새가 먼저냐 정석이 먼저냐를 놓고 따지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주 등장하니 법칙으로 정리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고, 법칙을 배우다 보면 자주 쓸 수밖에 없으니까요.
영어 공부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볼까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면, 문법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장을 단어 단위로 쪼개면서 하나하나 이유를 이해하면서 배워야, 실제로 영어를 쓰는 상황이 되었을 때 다양한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죠. 자신이 배운 문법 내용을 잘 설명하는 문장을 최대한 많이 접하면서 따라 말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내가 영어를 말하고 쓸 때는 문법에 맞고 틀리고를 의식하면 안 됩니다. 문장의 구조를 최대한 쉽게 정리된 형태로만 기억에 남긴 채, 세세한 내용은 잊어버린 상태에서 마구 내뱉어야 하죠.
글쓰기 또한 그렇습니다. 작법을 익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작법에만 매몰되어서는 글 쓰는 재미를 느끼기 어려운데요. 그래서 저는 지식을 정석으로 배울 때, 단순히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걸 만든 사람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던 것일까? 더 쉽고 좋은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내가 이걸 만든 사람이었다면, 과연 나도 이런 방식으로 했을까? 를 상상합니다. 어쩌면 이런 상상력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게 아닐까요? 이런 상상력을 좋아하다 보니, 상상력을 자극해 주는 사람의 콘텐츠를 자주 접하나 봅니다.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되려면 일단 무엇보다 쉬워야 합니다. 쉽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능적으로, 감정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될 때, 쉽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쉽다는 것은 곧 [자연]스럽다의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배운 문법, 작법과 실제 사용하는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를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게 체화된다면,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굳어지게 된 나만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정석을 갖게 된다면, 비로소 실력은 빛을 발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글, 이미지, 동영상 등 각종 형태를 막론하고, [콘텐츠]란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단골이 붙어야 맛집이고, 또 보게 만들어야 콘텐츠 아닐까요. 그렇다면 다시 찾게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 봅시다. 저는 why? 질문을 자극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why?가 없는 콘텐츠는 아무리 화려해도 영 끌리지 않았습니다. why? 질문을 자극하는 콘텐츠는 머릿속에 쉽게 흡수되고, 흐름이 자연스러워서 또 찾고 싶게 만듭니다. 이왕 콘텐츠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시 찾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자연스러움을 달리
표현한다면 최적화
한동안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앞서 자연스럽다는 쉽다의 다른 표현이라고 표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 아쉬운데요. 자연스러움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더 적합한 단어는 없을까를 고민하면서 다양한 단어를 고르고 고르던 중, [최적화]라는 단어를 보고 딱 알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러움은 주어진 환경 속에 적응하여 가장 최적화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죠.
정석이란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내용을 누군가 체계적으로 최적화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정석을 따라간다면 자연스러움의 단계에 빨리 도달할 수 있겠죠. 궁극적으로 도달한 목표는 최적화된 상태겠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적절히 나만의 방법을 섞어가면서 할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어떤 길이 나에게 익숙한가, 어떤 길이 나와 잘 맞느냐에 따라 선택지는 달라질 뿐이겠죠. 정석에 순응하면서 최고의 효율을 따라가는 게 잘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만의 길을 찾을 때까지 계속 좌충우돌하면서 답을 찾아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각자만의 접근 방법이 다를 뿐, 각자가 생각하는 최적화된 상태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최적화를 추구하게 되는 걸까요? 가장 최적화된 상태는 힘이 가장 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인간에 가장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면 불로소득의 욕구가 아닐까요. 적은 노력을 들여서 최대한 많이 성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가 최적화된 상태를 지향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최적화가 이뤄지면 한동안 이 길은 다수가 선택하게 되고, 이 길이 옳은 길이자 정답인 것처럼 인식합니다. 한때 왕정이나 독재 정치가 정치 체제의 최적화를 이뤘던 시대도 있었지만, 현재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최적화를 이룬 것과 비슷하죠. 물론 이름만 민주주의를 걸어놓고, 제멋대로 정치하는 나라도 있겠습니다만.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만났던 민주주의가 정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 중 최적화된 상태일 뿐이죠.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711422&no=483
이러한 최적화와 자연스러움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웹툰 [삼국지톡]에 마침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나라 최강자 위왕 조조 : 권력이란 무엇인가. 단단한 돌? 뜨거운 불? 아니, 물이다. 고랑 따라 질질 흐르다, 파인 곳 있으면 고여드는, 게으르고 자존심도 없는 물! 엉망진창인 물길을 아무리 열심히 정리해도, 강물은 수백, 수천 년간 흐르던 모양대로 돌아가지. 습관이 이래서 무서운 거야.
_ 네이버 웹툰, 삼국지톡, 한중왕, 유비_04. 책사, 장비 (1) 박살난 유비군 中
모두 물과 같이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불협화음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각자가 최적화한 자연스러운 상태대로 살고 싶다는 것, 각자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믿는 믿음대로 살길 원한다는 점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최적화의 개념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가치관]이 되고, 법인에 적용되면 [문화, 철학]이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치관, 문화, 철학의 충돌만큼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으니 말이죠.
3.
정답사회에서 외치는
자연스러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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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쓴 책, 정세현의 통찰을 읽어보았습니다. 국제 정치를 국가라는 이름의 조폭들이 벌이는 세력 싸움이라고 한 문장으로 설명해 주셨는데요. 이 문장을 볼 때, 국제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확 열리는 걸 느꼈습니다. 조폭은 직접 연장을 들고 싸우고, 국가는 전차와 미사일로 싸울 뿐입니다. 조폭들의 세력 싸움에 필요한 건 전쟁과 세금밖에 없는데, 이것 역시 거시적으로 보면 국가의 운영과 닮았는데요.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전 세계 최강 국가가 되었습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이 국제경찰 노릇을 하던 시절에는 미국 외에 다른 나라들은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게 가장 최적화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만든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늘 미국의 눈치를 보기 바빴는데요. 조폭이 자신의 나와바리를 지켜주는 대신 상납금을 바치는 형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국제 정치의 관계에서도 어떤 선택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각자에게 최적화된 방식은 존재하고, 어떤 방식을 선택하는지에 차이가 있을 뿐이죠. 마치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관계를 이용하여 실리외교를 따르려 했던 광해군과 광해군의 선택을 모두 부정하기 위해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초래했던 인조가 떠오릅니다. 당시에는 광해군의 선택이 틀렸고 인조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겠지만, 두 차례의 전쟁을 겪게 되면서 이 선택은 반대의 결과를 낳았죠.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의를 부르짖지만, 각자가 최적화한 정의를 말합니다. 그래서 민중이 생각하는 정의와 거리가 생기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 정치가 중에서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토록 똑똑하다고 알려진 사람이 어떻게 저런 이상하다 싶은 말을 하고 있나 싶었습니다만,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요. 그 정치가는 정말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맞게 행동했던 게 아닌가 싶은 겁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라가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도리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아무리 이상한 신념이라고 해도 30년 넘게 지지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미처 보지 못했을 뿐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뭔가가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자신이 옳다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사는 것일 테니까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 보면, 기존에 나아가는 방향을 잃습니다. 기존의 방향을 잃어야만 새로운 방향이 생기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하나의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당연했는데, 복수정답을 인정하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예전의 정답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시대가 변화합니다. 이렇게 시대가 변화하게 된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정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변화한 시대는 뭐든 못마땅하지 않을까요.
저 또한 정답사회에 소속된 시민이었습니다. 정답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이었죠. 이러한 속성이 쉽게 바뀌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변화가 있었다면, 예전에는 정답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고 할까요. 때로는 복수정답도 인정하기도 하고, 예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것도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유연함이 생기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러우니까,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마치 파인 곳을 채우는 물처럼 흘러가는, 또 흘려보내는 지혜를 배웠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