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오랫동안 캔버스 위에 칠해진 물감은 유화물감이었다. 유화물감은 작품을 만들기에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기름을 써야 하고 쓰는 순서를 알아야 하고 그림을 그리는 화판이 어느 정도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화보다 더 광범위하게 쓰이는 물감은 없다. 기술의 발달은 화구에도 영향을 미쳐 내광성이 낮다고 생각되던 수채물감에 작품을 그릴 만한 내광성을 부여했다. 화구도 기술 발달로 업그레이드 됐지만 물감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없던 새로운 물감이 탄생했다.
아크릴 물감이라고도 부르는 아크릭 물감은 유화물감 대신 사용하는 물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실 작품용보단 리폼 용도로 더 많이 쓰인다. 캔버스만이 아니라 가구에 신발에 심지어 돌 뒤에도 그릴 수 있다. 굳은 뒤 프라스틱 같은 느낌이 싫다는 사람도 있지만 은은한 광택, 냄새도 거의 없고 물로 희석할 수 있고 마르면 단단히 굳어 아크릭 물감 사용자는 꾸준히 늘어나는 중이다.
이 물감의 역사는 100여년 전에 독일에서 시작했다. 독일의 한 화학자가 물로 희석가능한 플라스틱 수지를 만들어 냈다. 이 물질은 계속 개량돼 1930년대에 다용도로 쓸 수 있고 사용하기 쉬운 아크릴 수지 에멀젼이 만들어졌다.
아크릴 수지 에멀젼은 물로 희석 가능하고 마르면 탄성이 있고 투명해지며 단단히 굳어 내구성이 높았다. 독성도 없고 온도 특성도 좋고 접착력이 아주 우수했다. 그렇다. 이 물질은 초기부터 우수한 성능의 접착제로 개발됐고 지금도 주로 접착제로 사용된다.
접착제 이외에도 건축용 바닥 재료, 나뭇조각으로 만든 블록이나 판재, 섬유 바인더 등에도 쓴다. 물로 희석하지만 물이 마르면서 건조해지는 건 아니다. 물이 빠져나가면서 내부의 분자들이 서로 이어져 젤 형태의 물질이 고체로 바뀐다. 이걸 중합반응이라 부른다.
유화물감의 린시드도 이런 중합반응을 통해 단단한 물질로 변하며 안료를 캔버스 위에 단단히 고정한다. 수채화나 유화나 아크릭 물감이나 말린다라고 표현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세계에선 전혀 다른 과정으로 마른다. 다시 말해 물로 희석해서 쓰는 아크릭 물감은 수채물감처럼 수분이 증발해 굳는 것이 아니기에 한 번 마르면 다시 녹여 사용할 수 없다.
아크릴 수지 접착제가 등장하고 10년도 안 돼, 이 접착제에 안료나 염료를 넣어 산업용 페인트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랜 옛날부터 바인더는 물감 재료임과 동시에 접착제로 사용되었으니 뛰어난 접착 특성을 가진 아크릴 수지 에멀젼이 페인트로 만들어진 것은 필연적이다.
산업용 페인트이던 아크릭 페인트가 예술가를 위한 물감으로 다시 태어난 곳은 멕시코에서였다. 1950년대 일이다. 호세 L. 구띠에레즈(Jose L. Gutierrez)는 벽화 작업에서 아크릴 페인트를 접했다. 빨리 건조되며 어디든 바를 수 있고 마르면 단단한 피막을 형성하고 농도를 조절해 수채화처럼도 유화처럼도 그리고 대부분의 물체 위에 그릴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아크릴 페인트를 작품용으로 쓸 생각을 한 사람은 구띠에레즈만이 아니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벽화를 통해 이 페인트를 접했다. 빨리 마른다는 점 때문에 캔버스 위에서 유화물감 대신 쓰는 작가들도 꽤 있었다. 그는 이 페인트에서 사업성을 보았다.
1953년 호세는 회사를 만들어 Politec Acrylic Artists’ Colors란 이름으로 작품용 아크릭 물감을 출시했다. 1955년에는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네티에 위치한 Permanent Pigments Co.에서 지금도 아크릭 물감으로 유명한 리퀴텍스(LIquitex)가 출시됐다. 이 두 가지 물감이 바로 최초로 생산된 예술가를 위한 아크릭 물감이다.
Politec Acrylic Colors와 LIquitex는 작품용으로 나온 최초의 아크릭 물감이다.
보통 아크릭 물감을 유화 대용으로 많이 쓴다. 유화 같은 터치와 두께 표현이 가능하고 마르면 표면이 비닐 같은 광이 난다. 유화처럼 팻 오버 린을 지킬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크릴이 인기를 끈 것은 유화와 비슷한 점이 아니라 폭 넓은 표현능력 때문이다.
농도를 달리해 수채화처럼도 칠할 수 있고 유화처럼도 칠할 수 있다. 다른 특성을 가진 미디엄을 섞으면 유화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것까지 가능하다. 원래 접착제로 쓰였던 만큼 다양한 물질을 섞어 마치 물감처럼 쓸 수 있을 정도다. 모래, 곡식뿐 아니라 심지어 파스타까지 캔버스에 바를 수 있다.
어디든 잘 발리기에 공예용으로도 사용된다. 그림용보다 공예용으로 더 많이 쓰인다고 봐도 된다. 가구를 리폼할 때, 톨 페인팅에도 모형 도색에도 쓴다. 붓으로 칠하거나 에어브러시로 뿌리기도 한다. 다양한 점성으로도 나와 필요에 따라 특성을 조절해 사용할 수 있다.
내수성이 높고 어디든 잘 부착되고 단단하게 고정돼 야외 작품에 쓸 수도 있으나 칠할 곳의 표면 상태에 따라 오히려 쉽게 벗겨지기도 한다. 마르면 다시 녹지 않는데 이소프로필알코올, 톨루엔, 아세톤 등으로 지울 수 있다.
아크릭 물감의 장점이자 단점은 너무 빨리 마른다는 점이다. 바른 후에 10~20분 정도면 다 마른다. 그래서 캔버스 위에서 혼색하는 웻 인 웻 기법을 쓰기가 곤란하다. 건조 지연제인 리타터를 사용하면 건조속도가 느려지지만 이것도 약간 느려지는 정도. 그렇다고 리타터를 너무 많이 석으면 이젠 잘 굳지 않게 돼 곤란하다.
캔버스에서 빨리 마르는 건 좋지만 곤란한 건 붓과 팔레트에서도 빨리 마른다. 팔레트에서 마르니 그리는 중에 계속 새로 짜 써야 한다. 이걸 완화하는 방법도 많이 고안돼 있다. 큰 밀폐 용기 안에 물티슈를 두껍게 깐 다음에 그 위에 팔레트를 올려 쓰는 방법이다.
안 쓸 때엔 뚜껑을 닫아 보관할 수 있고 수분에 의해 물감이 금방 굳지 않고 유지된다. 뚜껑을 덮어두면 최대 3일 간 굳지 않고 쓸 수 있다. 팔레트에 굳은 물감은 재사용할 수 없고 버려야 하기에 팔레트에 랩이나 호일을 씌워 쓰는 사람도 있고 1회용 팔레트도 많이 쓴다.
특히 붓 관리가 곤란하다. 붓털 사이에 물감이 말라버리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이를 방지하려고 쓰지 않을 땐 물 속에 담궈둔다. 붓은 물에 담궈두지 말라고 하나 붓에 묻은 아크릭 물감이 마르면 통으로 버려야 해 차라리 담궈두는 쪽이 낫다. 붓을 물에 오래 담궈두면 붓대가 물을 머금어 부풀어 올라 칠이 갈라지고 고정이 벌어져 흔들리기에 몇몇 아크릴용 붓은 붓대가 프라스틱이다.
아크릭 물감은 사용 분야가 넓은 만큼 특성도 다양하다. 젤리 같은 형태의 헤비바디 타입. 일반적인 물감 농도의 소프트바디 타입, 점성이 약해 흘러내리는 플루이드 타입이 있다. 헤비바디 타입으로 입체감 높은 회화를 그릴 수 있고 플루이드 타입은 얇게 바를 수 있어 공예용으로 좋고 요즘 유행하는 마블링 그림 그릴 때 많이 사용한다. 아크릭 잉크는 딥펜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 맑은 수채화 느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크릭 물감에 사용되는 다양한 종류의 미디움이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면 아크릭 물감의 특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아크릭 물감을 직접 만들고 싶다면 아주 간단하다. 미디움을 사서 안료와 섞으면 된다. 그게 끝이다. 수채 과슈처럼 아크릭 과슈도 있다. 반투명하고 광택이 있는 아크릭 물감과 달리 아크릭 과슈는 무광이며 얇게 발리고 불투명하다. 마르면 다시 녹지 않기에 수채 과슈랑 달리 자유로운 덧칠이 가능하다.
앞서 접착제에 안료를 섞어 물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 ‘혹시?’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지 싶다. 그렇다 목공용 풀이 아크릭과 굉장히 비슷한 특성을 보인다. 아크릴 수지 에멀젼보다 특성은 좋지 않지만 일반적인 사용에선 문제가 없다. 목공용 본드의 본 명칭은 약간 식초 같은 냄새가 나는 초산비닐수지이다. 그래서 이걸로 만든 물감을 비닐 물감이라고 부른다. 저가 아크릭 물감은 사실 비닐 물감인 경우가 많다.
출처 픽사베이
위의 그림은 요즘 아주 유행하는 마블링이다. 이것은 플루이드 타입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미네랄 오일과 아크릴 물감을 바르거나 뿌리면 미묘한 버블들이 생긴다. 그리고 버너로 가열하면 큰 얼룩들이 만들어진다. 자세한 건 본인도 모르니 세세한 건 직접 해보는 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