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Is the Time to Visit Vilnius
모처럼 날이 좋다. 연일 영하 십몇 도를 찍던 기온이 지난주부터 영하권에서 벗어났다.
빌니우스에는 계절이 딱 두 가지, 그린윈터와 화이트윈터가 있다. 물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지만 그 경계는 매우 모호하고 푸른 녹색을 볼 수 있는 그린윈터와 하루가 멀다 하게 눈이 오는 화이트윈터가 있다. 'Baltic'의 단어 뜻이 이 나라말로 흰색인 것을 보면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의 나라들은 얼마나 이 흰 눈과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 한여름 기온도 20도를 왔다 갔다 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데다 나라 전체를 뒤덮은 숲은 바야흐로 그 빛을 발한다. 지난여름 휴가지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영국인 아저씨가 자기는 빌뉴스 인근 어느 숲에서 열리는 숲 속 콘서트에 참가하러 리투아니아로 간다며 매해 여름이면 이곳에 와서 여름을 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이렇게 더울 때 서유럽 휴가는 '바보 같은 짓'이라며 나를 급 우울하게 만들었었다. 기차레일이 휘어서 기차가 안 다니고 33도를 웃도는 기온에 에어컨 없는 런던의 빨간 버스에서 쪄 죽다 빌뉴스에 돌아오는 길이었던 나는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을 겨우 깨닫고 있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리투아니아의 그린윈터와 화이트윈터의 온도차는 단지 기온뿐 아니라 사람들의 표정, 도시의 기운부터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름날은 11시 반까지 해가 있는 백야가 계속되고 겨울은 3시부터 어둑해져 5시면 캄캄해질 뿐만 아니라 한 달에 해가 나는 날은 고작 며칠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회색의 나날들이 계속되는 11월부터 3월까지의 길고도 긴 밤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함박눈이 춤추며 떨어지는 겨울왕국이라 해도 햇빛이 없다는 건 정말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비타민D를 주섬주섬 챙겨 먹고 긴긴 겨울을 견뎌야 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회색의 긴 겨울이 익숙하다는 이곳의 친구들도 한 달에 한두 번 겨우 해님이 반짝하는 날은 어김없이 내게 놀러 가자는 연락이 온다.
"오늘날 좋은데 뭐 해? 나와, 오늘 올드타운에서 엄청 큰 콘서트가 있어."
Happy Bithday Vilnius 700.
1월 25일이 수도 빌니우스의 탄생 70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오늘 성당광장에서 큰 콘서트가 있다고 했다.
수도 빌니우스의 공식 역사는 1323년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the Grand Duke of Lithuania Gediminas)가 외국 상인과 장인들에게 보낸 1월 25일 자 편지에서 이 도시를 처음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2023년이 꼭 700 주년이 되는 해여서 도심 곳곳이 빌뉴스의 다채로운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와 세계각국에서 참여한 작가들의 빛을 소재로 한 다양한 거리전시가 있었다. 빌뉴스를 소재로 한 영화, 17세기 빌뉴스에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를 AI로 재구성한 작품, 현대미술관의 대규모 전시, 콘서트 등이 있었다. 그중 에너지 기술 박물관(www.etm.lt)에서 열리는 'Salve, Vilnius'DCC'전시회가 눈길을 끈다. 'Salve, Vilnius' 이름은 빌뉴스(Vilnius) 시에 있는 일부 오래된 주거용 건물의 입구 문지방에 보존된 라틴어 비문 "Salve"(lit. hello)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둥근 모양의 프레임 안에 그려진 작가들의 작품들은 구시가지의 구불구불한 거리, 빌니우스의 오래된 건축물의 매끄러운 디테일을 암시한다고 했다.
리투아니아에 살면 살 수록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이들의 예술에 대한 삶의 태도는 지극히 진지하며 매력적이다. 특히 DNA에 숨겨진 듯한 고전적인 예술감각과 예술을 즐기는 방식은 마치 한국인들이 판소리나 전통악기를 접할 때 느껴지는 피가 끓어오르는 향수 같다고 해야 할까? 오페라를 보고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고 소박하지만 좋은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갤러리는 카페만큼이나 많아 골목골목에서 마주친다. 그냥 예술이 삶이고 사유하는 하루가 너무나 당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북유럽인들 특유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이방인에게는 무한한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성당광장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모처럼 포근한 날씨 덕분인지 온 동네 강아지들과 아이들은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모두 성당광장에 나온 것 같았다. 친구 예바와 마리우스, 다리우스, 그리고 마리우스 강아지 그리 나스와 함께 공연이 잘 보이는 길 건너 도로에 자리를 잡고 공연을 기다렸다. 7시 30분에 시작한다는 콘서트는 빛을 형상화 한 레이저 쇼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국민가수 같은 사람이 나와 '지금은 밤이 아니야, 곧 아침이 올 거야'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따라 부르는 그 노래는 1991년 소비에트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노래라 했다.
'우리나라 아침이슬 같은 노래구나'
혼자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데 친구들이 빛을 소재로 한 조형물 전시를 보자고 권한다. 온 동네 아이들과 강아지들 빌뉴스 시민들은 모두 나와 모처럼 시내가 북적거린다.
친구들을 따라 뱅쇼를 홀짝거리며 걷다가 마주치는 Vilnius Light Festival의 조형물들을 둘러 보며
밤길을 걷는 오늘밤은 나도 왠지 이들과 함께 중세의 보헤미안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