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상과 한 몸이 되어버린 직관 (2)
# 2025. 04. 27.
하루의 벼락치기가 통했는지 다행히도 정보처리기능사 실기에 단번에 합격했다. 실기 점수는 76점. 60점이 커트라인인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시험장에서 확인했을 때 열세 문제 정도 정답을 확신했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높은 점수이다. 다음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토익 시험이다.
토익 시험의 날짜는 4월 27일.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지난 정처기 실기시험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아예 공부를 하지 않고 생으로 시험을 봤다. 이때가 컴퓨터구조 랩 기한과 겹쳐 바빴기 때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컨디션이 굉장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봄은 나에게 중간고사의 계절이면서 알러지의 계절, 그리고 감기의 계절이다. 개중에서 중간고사는 진작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비염과 알러지와 감기 기운은 도무지 달아날 생각을 않았다. 시험 전날에 간단하게 문제 유형이라도 익히고 가겠다는 의지가 무색하게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도서관에 있기가 민폐일 정도로 콧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내 영어 실력 그대로 시험을 쳐보자는 결심에 '520점만 넘기면 가산점 1점은 따니까 걱정하지 말자'는 위로 한 스푼을 섞어 마시고는 잠에 들었다.
그러나 전날의 컨디션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험 당일의 컨디션이 더 좋지 않았다. 이제는 비염에다가 몸살감기 기운까지 겹친 듯했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길래 미리 사놨던 마스크를 끼고 유니폼을 주섬주섬 입은 다음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토익 시험장이 동성로 YBM 센터였기 때문에 동대구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반월당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시험 칠 때가 되니 컨디션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콧물이 계속 흐르긴 했지만 전날만큼은 아니었다. 토익 시험은 LC (Listening) 파트와 RC (Reading)으로 나누어진다. 전날 잠깐 보고 간 파트가 리스닝 부분이었는데, 생각보다 문제가 굉장히 짧고 빡세다. 1초만 집중을 놓아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고, 선지들이 헷갈리기 쉽도록 내는 경향이 짙어서 이 부분이 특히 어려웠다. 하필 내 시험장은 듣기 평가 소리가 좀 울리는 경향이 있어, 안 그래도 알아듣기 힘든 영국/호주 원어민의 발음이 더 듣기 어려웠다. 리스닝 파트에서는 찍은 문제가 수없이 많았다.
반면 리딩 파트는 평이했다. 수능 영어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무난하게 400점대를 받아갈 수 있는 파트라고 생각한다. 리스닝보다는 체감 난도가 훨 낮아서 금방금방 풀 수 있었다. 마지막 문제까지 푸니까 시간이 거진 다 되어서, 5분 정도 멍을 때리고 있다가 시험지를 제출하고 퇴실했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시험을 보니 몸이 조금은 개운해진 기분이었다.
동대구역으로 돌아간 내가 점심 메뉴로 생각한 것은 속이 시원하게 풀리는 라면이었다. 뜨겁고 얼큰한 음식을 먹으면 마치 해장하듯 컨디션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동대구 터미널에 올 때면 즐겨 찾는 분식집에서 라면 한 그릇을 시켰다. 이곳 라면이 특별할 건 없지만, 이전에 허기진 채로 원정을 떠날 때 내 배를 채워준 고마운 라면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날의 경기는 무엇이었는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날은 김천 원정이 있었던 날이다. 김천 원정을 작년에 가고 싶었는데, 시험 기간과 비 오는 날씨가 겹쳐 미처 가지 못했었다. 이번엔 토익을 치는 김에 김천 원정도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구에서 시험을 본 다음 기차를 타고 김천으로 향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다만 이 정도로 나쁜 컨디션은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러나 아픈 몸을 이끌고 경기를 보러 꾸역꾸역 찾아온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울산 선수들의 경기력은 마치 내 컨디션과 같이 최악을 달렸다. 이 사람들도 몸살에 걸린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이상한 실수를 연발했다. 가뜩이나 패스 합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시즌 초부터 들었는데, 이 날은 패스미스가 심할 정도로 많았다. 특히 강민우의 백패스는 프로 선수의 패스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패스는 조현우의 발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유강현에게 가로채어졌다. 조현우가 이를 미처 저지하지 못하면서 골대가 비어버렸고 그대로 실점한다. 쌍욕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목이 아파 죽겠는데 말이다.
그 이후로는 졸전의 연속이었다. 기억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전반이고 후반이고 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89분에 또다시 실점. 유독 이번 시즌은 헤딩 실점이 많은 느낌이다. 솔직히 이때가 되니 한 골정도 더 넣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이라도 경질하게.
# 2025. 05. 11.
팬으로서 보기가 힘든 경기가 유독 많은 이번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큰돈을 들여 제주도로 원정을 떠났다. 비행기 티켓을 결제한 지는 꽤 되었다. 정처기 시험 공부해야 할 시간에 딴짓을 하다 제주 원정을 준비해 보자 해서 무작정 표를 끊었었다. 제주 원정을 떠나는 이유도 단순 명료했다. 군대를 가게 되면 2년 동안은 못 가보는 데다가, 비행기를 타고 원정을 너무나도 떠나보고 싶었다. 제주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 것도 2017년이니 8년이나 지났거니와, 이번에 가지 않으면 2년 후에나 갈 수 있으니 교통비가 아무리 비싸도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비교적 편안하게 다녀온 원정길이었다. 컴퓨터구조 랩 과제는 구현을 끝내놓은 데다가 전날 외할머니의 팔순잔치에서 소고기도 얻어먹고 용돈도 받은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사실 랩 구현이 덜 끝났다는 걸 월요일에 보고서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팔순잔치에서 소주를 몇 잔 얻어먹어서 당일에 잘 일어날까 걱정했는데, 비싼 돈 들인 비행인 만큼 늦지 않고 여유롭게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포항경주공항으로 향했다.
K리그를 보다 보니 비행기를 타고 원정을 가보는 경험도 하게 된다. 이런 여정들이 너무 즐겁다. 원래도 기차와 지하철을 타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는데, 이런 역마살과 K리그가 합쳐지니 '원정 여행'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취미로 완벽하게 내 인생에 자리잡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좋아하는 버스와 기차, 비행기같은 이동수단을 타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보러 가는 것만큼 완벽한 취미는 앞으로도 찾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팀이 망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 짓을 하지 않을까?
비행기는 사뿐히 포항 하늘을 날아올라 제주도로 향했다. 올해 1월 보홀로 떠났을 때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탔으니 4개월 만이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이륙할 때의 그 짜릿한 기분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포항의 구름 낀 하늘이 점차 걷히고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바람이 거세어 첫 비행에서 심장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던 2017년과는 다르게 이번 착륙은 꽤나 부드러웠다. 대학생이 되어 이제는 혼자서도 제주도를 오는구나.
자차가 따로 없는 나로서는 공항 주변의 맛집을 찾아가서 먹기에 한계가 있어서 공항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푸드코트에 입점해 있는 '제주리 식탁'에서 흑돼지 김치찌개와 간장제육을 주문했다. 김치찌개는 먹을만 했지만 간장제육은 식감이 좋지 못했다. 배를 채우기에는 나쁘지 않는 메뉴였다. 내 자리 주변에는 온통 외국인 분들과 식사를 하러 온 승무원 분들이 계셔서 제주에 온 기분이 물씬 느껴졌다.
제주공항은 제주시에 있지만 제주월드컵경기장은 서귀포에 위치해 있다. 한라산 너머 정반대편의 경기장까지 제주도 반바퀴를 돌아야 한다. 신기하게도 둘을 바로 이어주는 버스가 꽤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182번. 제주도의 급행 버스로 181번과 함께 한라산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노선이었다. 181번은 시계 방향으로, 182번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정류장에 가니 생각보다 금방 버스가 왔다. 버스에 몸을 싣고 1시간 10분 동안 경치도 구경하고 못다 잔 잠도 보충했다.
서귀포버스터미널 앞에 내렸다. 처음에는 월드컵경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다. 터미널 건물 뒤쪽에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지만 나는 저게 배의 구조물이거나 교량의 시설물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파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니 저 거대한 기둥들과 줄들이 경기장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위압감이었다. 경기장이 이렇게도 웅장하게 생길 수 있구나 생각했다. 경기장을 등지고 펼쳐져 있는 바다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낭만있는 경기장이 이곳이 아닐까? 축구팬이라면 한 번쯤은 와봐야 할 경기장으로 나는 단연 이곳을 꼽고 싶다. 제주도인 만큼 주변에 관광 시설도 많고, 경기장 내부에도 야시장이나 아쿠아리움 등이 마련되어 있어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제주도 여행 올 때 한 번쯤 들르기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입장을 시작하는지라 경기장을 반 바퀴정도 둘러보다 게이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트랙이 경기장 주변에 깔려 있어 바닥이 푹신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울산 팬들이 벌써부터 많아 보였다. 다들 가족 단위로 여행을 겸해서 온 분들인 것 같았다. 하긴, 나처럼 당일치기로 경기만 보러 제주도를 찾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삼다도(三多島)답게 바람이 시원스럽게 불었다.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생각보다 바람이 서늘해서 미리 준비해 온 겉옷을 걸치고 경기를 기다렸다. 중간에 용변을 보려고 화장실을 찾아 나섰는데, 신기하게 경기장 아래쪽의 게이트로 들어가야 화장실이 나왔다. 일반적인 경기장에서는 이 위치에 관중들이 출입하는 게이트가 있기 마련인데, 제주월드컵경기장은 출입구가 아니라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화장실이 위치한 것 외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빈 공간이었는데, 홈석 방향으로 복도를 따라 들어가보니 앞서 언급했던 야시장이 나왔고 아쿠아리움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나왔다. 원정석에서 홈석으로 아무 문제 없이 드나들 수 있어 보여서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제주 구단 자체가 부천 외에는 크게 팬 끼리 앙숙인 곳이 없어 홈 팬들도 야시장 등을 즐기게끔 하려는 의도인가 생각했다.
어린 친구들의 태권도 시범으로 산뜻하게 시작한 경기는 뜻밖의 이른 시간 선제골로 달아올랐다. 김영권이 가볍게 찔러준 패스가 루빅손에게 절묘하게 떨어지면서 일대일 상황이 만들어졌고 루빅손이 깔끔하게 접고 때린 슈팅이 김동준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전반 4분만이었다. 얘네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골을 넣을 애들이 아닌데, 굉장히 의외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 골 넣은 뒤로 집중력을 잃는 패턴은 그대로였다. 찬스를 몇 번 허용하면서 심장을 졸이게 했다.
후반전에는 그야말로 정신이 나갈 뻔했다. 요새 울산은 선제골 이후 흔들렸던 분위기를 바로잡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팬들의 마음가짐과는 사뭇 다르게 경기를 운영하기가 부지기수다. 강한 슈팅을 한 번 허용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유리 조나탄에게 후반 이른 시간에 높은 타점의 헤딩으로 동점골을 실점한다. 이제는 실점이 익숙하다. 그래도 믿을맨 에릭이 있으니 뭐라도 해서 앞서나가는 골을 넣어야 한다.
제주는 그 이후로도 왼쪽 측면에서 여러 차례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한 번 쏠린 분위기를 다잡지 않으면 추가 실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오잉, 그런데 웬걸. 평소와 같이 오른쪽에서 드리블 준비를 하고 있는 엄원상을 향해 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하며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드리블 대신 바로 크로스를 올리더니 공이 에릭의 발에 맞고 김동준 키퍼를 스쳐 골대로 향했다. 공이 골키퍼의 손에 맞길래 선방한 줄 알았는데, 행운의 골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터진 두 번째 골이었다.
이렇게 평화롭게 경기가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래 1점 차로 이기고 있는 팀의 팬들은 얼른 점수를 더 벌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다. 1점 차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점수이기 때문이다. 약속된 플레이를 통해 왼쪽 측면에서 보야니치가 올린 크로스가 김동준과 경합한 김민혁의 머리를 맞고 골문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안도할 수 있는 점수차에 환호하던 찰나, 야속하게도 김민혁의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골은 취소. 달아나지 못하는 순간에도 제주의 공격은 매섭게 이어져 오고 있었고, 팬들의 마음은 계속해서 불안해져 간다. 이번에는 보야니치가 중원에서 끊어낸 공이 에릭에게 향해 좋은 찬스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향하는 아쉬운 슈팅이 나온다. 제주의 공격을 끊어내며 에릭이 차지한 공이 강력한 몸싸움 끝에 제주의 골문 앞까지 향했으나 1대1 상황을 만들어내는 에릭의 킬패스를 라카바는 도로 뱉어내고 만다. 골문에 김동준 키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카바는 마무리해내지 못했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언제 골 넣을 테냐?
골을 넣으라니까 자꾸 다른 짓을 하는 울산 선수들이었다. 김민혁에게 골이 취소된 충격이 컸던 걸까? 이미 옐로 카드가 한 장 있던 김민혁은 공 대신 제주 선수의 다리를 걷어차고 시원하게 퇴장당한다. 나는 이미 정신이 나갈 대로 나간 터라 후반 추가시간 직전 퇴장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믿고 있었던 보야니치의 박스 안 핸드볼 파울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지난 홈 동해안 더비에서도 루빅손이 후반 추가시간 핸드볼 파울을 범했던 울산이었다. 천운으로 조현우가 PK를 멋지게 선방하면서 승점 1점을 지켜냈다. 극장골 먹혀 복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게 불과 지난 경기였다. 그런데 왕복 20만 원을 들인 천금같은 원정 경기에서, 그것도 추가 시간에 핸드볼 파울이, 또? 있을 수가 있는 일인가. 공교롭게도 지난 경기와 이번 경기 핸드볼 파울을 범한 선수는 울산 팬들이 그토록 아끼는 스웨덴 듀오였다. 어디에다가 욕을 할 수도 없고.
내 목숨을 살린 건 울산의 유일신 조현우였다. 조현우는 그 자체로 신이자 종교이다. 못해도 30만 울산 팬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조현우는 이번에도 골문 우측으로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선방. 지난 PK 선방이 주닝요의 실책일 뿐이라고 매도하던 사람도 이 장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승점 1점이 아니라 승점 3점을 지켜낸 선방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지켜봤던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탄식과, 폭소와, 실성이 어우러진 알 수 없는 웃음을 끊임없이 내뱉을 뿐이었다. 말이나 되는가? 두 번 연속 후반 추가시간에 박스 안에서 핸드볼 파울을 범했다. 그 두 명의 선수는 스웨덴 국적의 신임받는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두 번의 PK 모두 같은 방향이었고, 두 번 모두 조현우가 막아냈다. 조현우는 두 경기에서 승점 4점을 벌어다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잘 있어요'였다. 평소 같았으면 자축의 의미로 부를 곡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잘 있어요'였다. 짜릿한 여정과 짜릿한 경기를 선물해 준 제주를 향한 나의 작별 인사. 나는 도파민으로 망가진 정신을 다잡고 밖으로 향했다. 경기가 끝나고 김판곤 감독이 원정석 쪽에서 확성기를 잡고 뭐라 말하는 걸 봤지만, 어차피 들리지 않아 집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찍어준 영상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느 경기처럼 맥도날드로 향했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알맞게 끝난 경기와, 붉게 타는 제주의 노을과, 맛있는 빅맥. 뭔가 이상한 조합이긴 하지만 이만한 낭만이 또 없다. 이 날만큼은 빅맥이 제주의 특산물인 거다.
비행기 시간이 늦을까 빅맥을 허겁지겁 먹었는데, 알고 보니 비행기 시간을 착각한 것이었다. 21시 5분 비행기가 아니라 21시 45분 비행기였다. 뒤늦게 찾은 여유를 잠시나마 즐기다가 181번 버스에 올라 제주공항으로 다시 향했다. 내 비행기가 향하는 곳은 포항이 아닌 대구. 늦은 시간이라 제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비행기가 없어 대구로 가야만 했다. 대구공항에서는 버스 막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동대구역에서는 KTX 막차를 타고 포항으로, 포항역에서는 택시를 타고 기숙사로. 다행히도 마지막 KTX를 타는 분반 친구가 있어 조금이나마 택시비를 아낄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말도 안 되는 당일치기 제주 원정의 여정은 이다지도 한 순간의 꿈처럼 지나갔다.
EP 05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