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3. 내가 직관을 가는 방법

이제는 일상과 한 몸이 되어버린 직관 (1)

by JS

# 홈 경기 관람하기


학교가 포항이라 좋았던 점은 홈 경기를 보러 가기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207번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면 포항터미널까지 금세 도착한다. 편도 만 칠백 원 하는 티켓을 사고 버스에 올라 다시 50분 정도를 달리면 어느새 신복교차로에 닿는다. 여기서 마을버스 하나만 타면 집까지 바로 올 수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 엄마가 데리러 오실 때도 있으니 집 가기 전 엄마께 전화 한 통은 필수다. 부모님은 내가 울산에 오는 목적이 부모님 뵈러 오는 게 아니라 축구 보러 오는 것이라는 데에 탐탁지 않아 하시지만, 막상 집에 장남이 오면 얼굴에 웃음꽃들이 피어나신다. 내가 없으면 집안이 안 돌아간다니까, 아무렴.


포항에서 9시 40분에 출발하는 차를 타면 10시 10분이 되어 신복교차로에 도착하니까, 집까지 이동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된다. 보통 내가 아침을 안 먹고 오기 때문에, 집에서 일찍 점심을 먹게 된다. 그러고는 2시 경기가 있으면 바로 버스를 타고 승엽이를 만나 경기장으로 간다. 경기가 끝나면 대략 4시쯤.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고 7시 50분에 울산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돌아가면 완벽하다. 여름에는 경기가 저녁 7시나 되어야 시작하기 때문에 포항으로 바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경기가 7시에 시작하는 더운 여름이 되면 보통 1학기가 거진 끝나가는 시점이기 때문에, 기말고사 공부로 어차피 홈 경기를 보지 못하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 7시 홈 경기를 봐야 한다면 뭐, 집에서 한숨 자고 돌아가면 될 일이다.


본격적인 직관을 시작한 지 이제 3년 차가 되니 이렇게 얼추 루틴이 하나 만들어졌다. 본가에 가는 겸, 홈 경기 보기. 내 고향의 팀을 응원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K리그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집과 가까운 경기장을 먼저 찾길. 직관 거리는 생각보다 덕질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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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면 좋은 점이 많다. 경기도 보고, 밥도 얻어먹고.


# 원정 경기 관람하기


사실 오늘 글의 핵심이다. 저번 학기 동안 내가 어떻게 원정 경기를 다녀왔는지 주절주절 읊고 싶어서 그간 입이 간지러웠다. 이번이 군대 가기 전 원정을 다닐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보니, 일을 이전보다 크게 벌렸다. 일정 측면에서도, 거리 측면에서도, 이동 수단 측면에서도 말이 안 되는 이번 학기 원정 경기의 여정들을 소개해보겠다.



# 2025. 03. 10.


뜬금없이 '군대'라는 서두로 시작하려고 한다. 24년도 여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입영에 관하여 찾아본 나는 공군 전자계산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요즘 다들 가고 싶어서 난리인 공군인 데다가 전공과 연관되어 있어 다른 곳보다 머리가 덜 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동생 덕분에 다자녀 가산점도 받을 수 있어 유리했지만, 총 115점의 1차 배점 중 50점을 차지하는 자격 / 면허 부분이 문제였다. 나는 별다른 자격증이나 면허를 갖고 있지 않으니, 전자계산 직군으로 인정되는 자격증을 하나 따야 한다. 그러나 일 년에 4번 열리는 기능사 시험 중 마지막 남은 시험의 시기가 공군 지원 시기와 맞지 않았다. 2학년 끝나고 공군을 바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학기를 더 다니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 이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지난겨울 방학부터 공군 점수 취득을 위해 다양한 것들을 해야 했다. 정보처리기능사가 그중 하나였다. 지난 1월 필리핀 보홀로 출국하기 전 부랴부랴 필기시험을 쳐 합격했으니 실기 시험이 남아있었는데, 실기 시험 일정이 수원 FC 원정과 겹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시험 응시와 축구 관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었던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포항에서 시험을 치고 수원으로 가는 루트, 대구에서 시험을 치고 올라가는 루트. 이 중에서 포항의 경우는 물리적으로 수원까지 제시간에 이동할 수가 없어 탈락, 대구의 경우는 수원까지 갈 수는 있었지만 시험 중 퇴실 가능 시간에 맞춰 바로 나와서 택시를 타야 수원 경유 KTX를 탈 수 있을 정도의 촉박한 일정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나는 우선 대구의 경북공업고등학교로 실기를 접수했다.


그러나 시험 날이 다가오자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일정에 맞추기가 어려워 보였다. 이때가 실기 시험이 일주일 정도 남은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직 공부를 시작조차 하지 않아 혹시나 퇴실 가능 시간에 맞춰서 바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기차 시간에 안전하게 맞추려면 택시를 타야 했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나 찾아보던 와중, 시험이 안양에서도 열린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안양에서 지지대고개만 넘으면 수원이니까,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 생각하고 빈자리 추가접수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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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사 시험 치러 포항에서 천안을 가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나.


그런데 웬걸, 추가접수 당일에 칼같이 큐넷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안양공고는 빈자리가 없었다. 혹시나 빈자리가 나중에라도 뜰까 연신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기도 잠시, 그냥 대안을 찾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다시 수도권의 온갖 시험장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수원종합운동장과의 거리를 지도로 검색했다. 평택 등지에 빈자리가 있었지만 이들은 수원에서 너무 멀었다. 경기가 두 시에 시작하는데, 도저히 일정에 맞출 수가 없었다.


내 계획에 한 줄기 빛을 내려준 곳은 바로 천안이었다. 서울과 경기도로 검색을 하는 바람에 충청도에 있는 천안이라는 선택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빈자리가 있는 수험장 전체로 검색을 하다가 천안공고에 빈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부리나케 수원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검색했다. 천안공고는 천안역까지 도보로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데다가 천안역에서 수원역까지 무궁화호를 타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안. 내 시험 장소가 뜬금없이 천안이 된 데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 2025. 03. 16.


시험 당일의 컨디션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3월 14일까지 공부를 하지 않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는 시험 전날 통으로 시간을 내어 이전에 사둔 문제집을 급하게 풀기 시작했다. 책 진도를 나가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끝까지 못 보겠다 싶어 아예 기출문제를 먼저 풀어버리는 전략을 썼다. 어차피 첫 차를 타고 올라가야 시험 시간에 맞출 수 있었으니, 새벽 4시 즈음까지 눈에 불을 켜고 기출문제를 풀다 기숙사에서 짐을 챙기고 포항역으로 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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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미친 게 틀림없다. 기차에서 공부를 하는 나라니….


9월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내가 준비해야 하는 것들 중 조금이라도 삐끗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기능사 시험은 한 번 떨어지면 몇 개월 뒤에나 시험이 또 있기 때문에, 입영도 덩달아 2~3개월 미뤄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간만에 느낀 위기의식 덕이었을까, 밤을 새워 충분히 졸린 데도 좀처럼 잠들지 않고 남은 기출문제들을 풀었다. 기차에서 뭘 해보기가 살면서 이 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기차를 타고 바깥 풍경을 보며 머리 식히는 걸 나는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기차에서 폰을 본다던가 노트북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날은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출 풀이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다음 천안아산역까지 눈을 잠깐 붙였다. 도착 안내방송이 나오니 화들짝 놀라 짐을 챙겨서 두통과 함께 기차에서 내렸다. 사진이고 자시고 찍을 정신이 없었지만, 나중에 이 미친 여정을 보여줄 사진 자료로 사용할 걸 생각해서 대충 승강장 사진 몇 장을 찍고 천안공고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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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치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이걸 경기를 보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실 기능사 시험 외에 신경 쓸 것이 없었다면 경기 관람을 고민할 이유가 없는데, 문제는 이것 외에도 내가 법학의 이해 퀴즈와 알고리즘 숙제 두 가지 할 일이 더 있었던 것이다. 법학의 이해 퀴즈는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 그에 관한 퀴즈를 푸는 것이라, 영화의 러닝 타임만큼이나 시간이 걸리는 과제였다. 알고리즘은 복습조차 안 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과연 포항에 8시에 도착해서 4시간 안에 두 개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컨디션도 안 좋고 비까지 오는데, 제대로 경기 관람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울산 HD 때문에 천안까지 시험 치러 온 '울친놈'임을 증명하듯, '여기까지 왔는데 경기를 안 보고 갈 순 없지' 하는 생각에 시험이 끝나자마자 곧장 천안역으로 향했다. 과제로 나온 영화야 경기 시작 전까지 짬짬이 보면 되는 거고, 알고리즘 과제는 포항 도착해서 하면 되는 거고. 까짓 거, 해보기로 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시험 문제가 빠르게 풀린 덕분에 퇴실 가능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짐을 챙겨 밖으로 향할 수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우산을 챙기지 않아 사거리 앞 편의점에 들러 우산과 우비를 샀고, 미리 예매해 둔 기차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길래 수원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표를 찾아 다시 예매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법학의 이해 과제에 쓸 넷플릭스를 얼른 결제하고, 기차를 타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영화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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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에서 밥 먹으면서까지 열심히 영화를 봤다.


이날 경기는 엄청난 바람과 추위, 에릭의 데뷔전, 라카바의 실축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겠다. 비가 내리던 날씨는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어느새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웬 바람이 그리도 부는지. 경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응원을 위해 외투를 기똥차게 벗어던졌지만 칼바람을 맞고는 얼른 다시 껴입었다. 선수단의 경기력도 날씨 때문이었을까? 전반 이른 시간에 안데르손의 역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루안의 데뷔골을 헌납했다. 마수걸이 골을 내주었기에 분하기도 하지만 이것만 실점하지 않았더라면 경기를 쉽게 가져갈 수 있었을 것 같아 더 뼈아프게 느껴졌다. 이희균의 동점골이 취소되고 우여곡절 끝에 얻어낸 PK를 라카바가 실축한 건 충격적이었다. 심판이 킥 직전 휘슬을 불어 흐름이 끊긴 탓인지 안준수 키퍼의 선방에 쉽게 막히고 말았다. 동점골을 넣은 건 다름 아닌 이적 이틀 차 에릭이었다. 루빅손이 찔러준 공을 에릭이 받아 수비수 틈 사이로 절묘하게 굴려 넣었다. 경기는 이렇게 무재배로 끝.


아쉬운 경기였지만 그래도 새로운 공격수 에릭의 가능성을 봤다는 것에 만족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대구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싣고 다시 과제로 나온 영화를 보기를 잠시, 바깥 풍경이 퍽 아름다웠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하늘은 어느새 맑은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조용한 기차 안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경부선의 조그마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를 감상에 젖게 했다. 대전 근처에 닿자 영화는 끝이 났다. 이제 포항에서 알고리즘 과제만 하면 되니, 걱정거리였던 과제들이 끝을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이 모든 여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내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과제하겠다고 축구를 포기했으면 어쩔 뻔했나. 축구 보러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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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영화에 과몰입한 나머지 거친 말들이 좀 들어가 있다.


EP 04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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