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소침하다.
나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고 자신이 없다. 사전을 찾아보니 ‘기운이 없어지고 풀이 죽은 상태’를 의기소침하다고 한단다.
최근 그래도 꽤나 흥미로웠다. 일기를 쓰고 향심기도를 한다는 것이 말이다.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해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다. 여말몸글 후속 모임에서 읽고 있는 책에서 90일 일기 쓰기를 권하였고 그래서 ‘정말로 해볼까?’하는 마음에 시작하기로 맘먹고 함께할 동지 있는지 물어보자 까치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래서 일기 쓰기가 시작되었고 오늘로 59일째이지만 19일째, 58일째 두 번 제쳤었다. 향심기도는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고 일기보다 조금 더 많이, 서너 번 빼먹었을 거다. 어떤 날은 잘 써지고 쓰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요즘은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하고 싶은 말도 없고, 뭔가 하나 건져 올려져도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고 (나만 보는 일기라서) 대략 대충 쓰고 말게 된다. 쓰다 보면 스스로가 못마땅해질 때가 많다. 하루를 돌아보면 딱히 잘한 거라고는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뭔가 꾸준히 스스로 해보고자 하는 내가 기특하기도 했는데 덜컥 막혀버린 계기가 있다면 ‘무엇을 기대하느냐’는 질문 앞에서였다.
내적 여정 - 영성 과정에서 하나님상에 대해 써볼 때, 내가 실제로 느껴지는 하나님상은 이렇게 썼었다.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 / 배제시키는 / 탐탁지 않는 / 얼마나 버티나 지켜보는 / 맘에 안 들어하시는 /
별로 자랑거리가 아닌
제일 처음 떠오른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 이 부분이 지금 의기소침에 대해 쓰려니까 떠오른다. 그래, 누군가 내게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앞에서 의기소침해져 있을 것이다. 뭐, 다른 사람은 전투력이 상승해서 보여주고야 말겠다!라는 다짐이 설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기대’라는 단어 앞에 덜컥 걸려서는 넘어졌거나 넘어질 뻔했거나 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지 않고 (못하고) 아빠의 의지로 임용고시를 준비할 무렵이었는지, 아니면 비정규직으로 특수학교에서 강사를 하고 있을 때 코이카 지원해보려고 한국어교원양성과정을 배우고 있던 때였는지 아무튼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막막했을 때였다.
어김없이 술 드시고 와서, 아니 어쩌면 술을 안 드시고 하셨던 이야기 일 수도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 분위기는 항상 아빠는 말을 하고 나는 묵묵부답으로 아빠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풀릴 때까지 듣고 있어야 할 그런 시간이었을 거다.
앞뒤 다 잘라먹고 그 말이 각인되었다.
“너도 생각을 좀 해봐라. 네가 어딘가에 계속 투자를 하고 있는데 뭐 나오는 건 없고. 그러면 속이 안 답답하겠냐?”
투자. 아 그러니까 아빠는 나에게 투자를 한 거였구나. 그런데 나는 투자금에 비해 이렇다 할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구나. 수익이 뭐야. 본전도 못 뽑고 마이너스지.
이제 머리로는 안다. 부모는 자식에게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자식을 보호하고 길러주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말이다. 만일 아빠가 지원해주기 버거웠다면 (나를 믿지 못해서라는 이유에서라도) ‘미안하다. 아빠는 더 이상은 지원해주기 힘들구나.’ 하면 될 일을. 야속하게도 ‘투자’라는 말을 가져와 자신의 답답함을 (어쩌면 안타까움이었을 수 있으나, 그건 내게 전해지지 않았기에) 나에게 호소한 것이다. ‘더 지원받고 싶어? 그러니까 좀 성과를 내봐. 좀 더 노력해봐. 그거 가지고 되겠니. 내가 너에게 부은 돈이 얼마인데. 네가 한 게 뭐 있는데 뭘 믿고 너에게 더 돈을 주냐.’ 뭐 이런 뉘앙스로 들렸다.
그러니까 나는 늘 기대에 못 미치는 탐탁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젠 그 누구의 시선이 어떠하냐 보다 우선 너 자신이 네 삶에 어떠한 기대를 하고 있는지 묻는 그 질문 앞에서 덜컥 걸려서, 무작정 달리고 걷고 나자빠졌던 길에서 멈춰 선 것이다. 의기소침해져서는 글쎄 내가 내 삶에 기대라는 것을 해도 될까. 나는 늘 실망만 해왔는데.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그 실망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데. 그거 참 괴로운데. 하나님이 정말 한낱 미물에 불과한 나에게 ‘기대’라는 걸 하실까. 여러 미물 중에서도 별 볼 것 없는 나에게? 너무 한가하신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빠의 목소리가 이젠 내 안의 목소리가 되어버려서 나에게 묻는다. ‘집안 꼴을 봐. 네가 은설이랑 남편한테 뭘 먹이고 있는지 생각해봐. 기본도 제대로 못하면서 뭘 하려고 해. 뭘 되려고 해. 지금 해야 하는데 못하는 거나 잘할 생각을 해. 자꾸 다른 데 기웃거리면서 헛짓거리 하지 말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
하루에도 여러 번 스스로 맘에 들 때도 스스로 맘에 들지 않을 때도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 한숨이 참 무겁다. 결혼하고 나서 자주 듣는 아빠의 멘트. ‘행복하냐? 그럼 됐어. 네가 행복하면 됐지. 그렇지?’ 그건 내가 진짜 행복한지 묻는 게 아니라, 아빠의 못마땅함을 계속 어필하고 닦달해서 아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싶지만 아빠의 말마따나 출가외인이 되었으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놓아버리는, 아예 기대를 말자 하며 포기하는 마음의 질문인 걸 나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아빠 앞에서 의기소침하고, 기대라는 질문 앞에서 의기소침하고, 하나님도 그러실까 봐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쪼그라들어있다.
그런데 자꾸 쪼그라들어있자니 화가 난다. 억울해 죽겠다.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는 거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거 알겠는데, 그래도 사람한테 자꾸 그럼 안 되는 거 아닌가? 저는 뭐 얼마나 잘났다고. 아빠의 기준으로 내가 못 미더운 만큼 내 기준으로 아빠도 참 못 미더운데. 내 기준으로 한 번 읊어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일부러 엉망진창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나도 잘 살아보려고 바둥대고 있는 건데. 알지도 못하면서. 알지도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