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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7. 2018

리 볼린저: 관용사회론

2015년 12월 13일 

볼린저 선생의 <방해받지 않고, 생동적이며, 개방적인(2010)>에 엄청난 떡밥이 담겨있다. 이 책은 심상치 않은 주장을 전개하는 중에, 과거 대표적인 언론자유 이론들을 요약해서 정리하는 척 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이론을 하나 툭 던진다. 각주를 찾아 보면 1986년 자신이 출판한 <관용사회(The tolerant society)>에 있는 ‘관용사회론'이란다. 


볼린저는 과거 전통적인 언론자유 이론들, 즉 (1) 인간의 자기실현 수단이라는 설, (2) 자유로운 정보교환을 통해 진실을 찾을 수 있다는 설, (3) 정부공개와 시민결정을 통해 자치정부를 실현하는 방법이라는 설 등이 제시한 뒤, 21세기 다원주의 사회에서 이런 과거 이론들은 불충분하다고 논평했다. 그는 대안적으로 언론의 자유란 ‘관용의 능력을 배양’해서 공동체의 붕괴를 막는 역할을 한다는 요지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요약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논의였다. 


궁금했다. 도대체 (1) 인권선언에서 유래한 ‘자기실현설’, (2) 밀튼-밀-홈즈로 이어지는 ‘진리발견설’, 그리고 (3) 메디슨-미켈존-브렌넌으로 이어지는 전통, 즉 <뉴욕타임즈-설리번 판결> 이후 미국 대법원의 언론자유 공식이론으로 자리잡은 ‘자치정부설’에 필적하는 새로운 이론이란 뭐란 말인가? 바로 책을 구해 봤다.   


표지를 딱 보니, 이거 언젠가 어디선가 분명 봤던 책이다. (심지어 서울의 내 책꽂이 어디에 복사본이라도 있을지도 모른다.) 서점 한 켠에서 보았나? 동료 선생의 서가에서 보았나? 표지는 심상에 남았는데, 배경에 대한 기억이 없다. 너 다시 잘 만났다란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대박이다. 내가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이 책은 표현의 자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그 어떤 이론보다 독창적이고 설득력있다.   

 

<관용사회>는 일단 1977년 <스코키 판결>에서 출발한다. 스코키 건은 미국 민족사회당, 즉 나찌가 유태인 공동체가 자리잡은 일리노이 스코키 시에서 나찌 복장에 스와스티카를 내결고 시위할 것을 계획하며 시작된 사태다. 스코키 시당국은 나찌의 시위계획을 불허했으며, 이에 대해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은 시당국의 명령이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수정헌법1조 위반이라고 위헌 소송에 나섰다. 혼잡한 사회적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리노이 대법원과 연방대법원은 나찌 행진에 대한 헌법적 보호를 인정했다. 책 전체가 스코키 판결에 이론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심정적으로 나찌의 시위에 절대 승복할 수 없는 미국인의 모순된 심정을 문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론적 탐구에 나선다.

   

볼린저 선생은 미국의 수정헌법1조 판례에 대한 검토와 언론자유 이론에 대한 논의를 경과해서 빠르게 자신의 독창적 이론으로 진행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관용사회론’ 역시 스코키 판결과 마찬가지로 나찌의 시위를 허락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그 이론적 정당화 방식이 전통적 이론들과 다르다. 나는 설득됐다. 그리고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볼린저의 ‘관용사회론’은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관용사회론’은 수정헌법1조란 미국적 특수성을 넘는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미국 예외주의적 경향을 간단하게 극복하고, 모든 다원주의-다문화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모형을 제시한다. 볼린저의 이론은 21세기, 즉 종교적 불관용이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인정투쟁으로 비화하는 현재 더욱 유력한 이론이 될 수 있다. 


둘째, ‘관용사회론’은 법조문, 판례, 그리고 독트린으로 ‘법적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준을 넘어 선다. 볼린저가 제시한 이론은 다문화사회의 조건에 대한 관찰, 인간의 소통이론, 그리고 바람직한 사회의 형성을 위한 제도론을 결합한 것으로서, 사회과학적 이론에 가깝다. 경험적 관찰명제를 전제로 포함한 사회이론의 성격을 갖는다. 이론적 정련과 경험적 검증을 거쳐 앞으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볼린저의 ‘관용사회론’은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는가? 이 이론이 반박하는 2 모형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볼린저는 이 두 모형을 각각 고전모형(the classical model)과 요새모형(the fortress model)이라 부른다. 



언론자유의 고전모형 


고전모형은 자유주의 사상에서 유래한다. ‘사상의 공개시장’이란 비유에 따르면, 누구도 미리 진실을 주장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주장이라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견의 개진과 토론을 통해서 바른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의견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이런 자유주의적 언론자유 사상은 미켈존의 자치정부론과 그 이론을 적용한 <뉴욕타임즈-설리번 판결(1964)>을 경유하여,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지배적인 해석론으로 자리 잡는다. 


미켈존에 따르면, 언론자유란 공적인 사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민주적 결정을 내리는 데 필수적이다. 요컨대, 언론의 자유는 ‘말하는 자의 자유’라기보다 어떤 말이든 듣고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듣는 자의 자유’이다. 투표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일반 시민들, 즉 ‘듣는 자’에게 모든 논점이 전체적이고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그들이 제대로 권력을 형성할 수 있다. 결국 언론자유의 고전모형은 ‘공적 사안에 대한 민주적 토론 및 의사결정 과정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주장으로 귀결한다. <뉴욕타임즈-설리번 판결>에 제시된 브레넌 판사의 논지, 즉 언론자유란 ‘공적 사안에 대해 방해받지 않고, 생동적이며, 공개적인 토론’을 위한 것이라는 논지가 바로 이 주장을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언론자유의 고전모형에 문제가 없지 않다. 자유주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언론자유의 고전모형은 수많은 반론에 부딪혀  그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고전모형은 ‘절대 다수가 명백하게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주장’을 허용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공동체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극단적 견해’를 규제하는 데 동의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합당한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규제해야할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이 모형은 ‘민주주의 자체를 전복하려는 견해’를 허용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명료하게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동요한다.  


볼린저는 특히 고전모형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복잡한 현실, 특히 다원적 가치에 기반해서 상시적 갈등이 전개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법이란 공동체의 가치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능을 가지며, 공판과 판결을 통해 공동체의 다양한 요구를 조정하는 ‘의사소통의 도구’로 기능하는 데, 고전모형은 이런 점도 가볍게 여긴다. 단지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에 근거한 주장들을 자유롭게 개진하라고 한 뒤, 그 주장이 ‘명백하고 현재적인 위험’을 초래할 경우법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현실적 문제에 대처하는 정도다. 대처할 뿐,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새모형 


요새모형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가장 위협적 요소, 즉 정부의 과도한 간섭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 역시 이론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것을 폭넓게 활용한다. 자유를 추구하는 시민 개인들이 맞닥트리는 정부의 간섭적 규제, 그리고 타인의 박해적 충동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현실적 대책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형은 미국적인 언론의 자유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특수한 이론이기도 하다. 미국 수정헌법1조를 적용한 판례는 유럽을 포함한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이 인정하지 않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한다. 요새모형은 이런 폭넓은 자유의 보장을 설명하는 데, 이는 역시 정부를 포함한 거대 권력에 대한 감시를 전통으로 삼는 미국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새모형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수많은 ‘소통에 대한 불관용 경향’을 막기 위해 말 그대로 폭넓은 면책 조건과 방어적 논리를 제공한다. 고유하게 발전시켜야 할 핵심 가치, 즉 민주적 토론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나찌의 행진’과 같은 불편한 표현적 행위도 함께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린저는 미국의 언론자유 전통이 <스코키 판결>을 용기있는 결단으로 상징화하고, 규제적 경향을 비겁한 태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 주목한다. 요새모형은 일단 정부의 간섭 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의 불관용 경향에 저항하는 이론적 틀을 형성한 뒤, ‘공동체 내의 분열적 대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과도하게 방어적이 되었다고 한다. 


<스코키 소송>을 이끌었던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의 지도자인 나이어의 견해가 요새모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유태인이었던 나이어는 시민운동단체가 ‘모든 약자를 법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적 방어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나찌의 행진을 보장하는 것은 진리를 찾거나, 민주적 자치정부를 형성하거나, 심지어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는 게 ‘미국적 덕목’이라서 그래야 하는 게 아니다. 나찌와 같은 소수파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언제라도 유태인을 포함한 다른 사회적 약자에 가해질 수 있는 억압을 막는  ‘법적 보호’가 가능하다는 정치적 고려에 따른 귀결이다. 


관용사회론 


볼린저의 관용사회론은 과도하게 이상론적인 고전모형과 과도하게 현실론적인 요새모형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이론적 대안이다. 흥미롭게도 이 이론은 (1) 모든 발언 행위가 소통적이라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2) 문제는 모든  소통은 표현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소통을 막을 수 있는 억압이 되기도 한다는 데 있다. 즉 공동체 내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행위만 소통이 아니라, 그런 소통에 대해 억압적 충동을 표현하는 행위도 소통인데, 모든 소통은 다른 소통을 잠재적으로 방해한다. 이런 조건에서 (3) 소통적 행위에 대한 통제는 ‘발언 자체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발언의 효과로 발생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감정의 통제에 대한 것이 된다. 


위의 전제들을 기초로 , 볼린저는 언론의 자유가 ‘발언의 보호’가 아닌 ‘절제의 학습’임을 주장한다. 특히 타인의 소통에 대한 박해적 충동을 절제할 것을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소통에 대한 박해적 충동을 제어하기 위한 절제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언론 및 표현의 자유의 근본적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스코키 판결>의 사회적 의미도 명료해진다. 볼린저가 보기에 나찌의 행진을 헌법적 권리로 보아 보호해야 할 이유는 그 행진의 ‘표현적 가치가 있어서’도 아니고, ‘나찌를 보호해야 나도 보호받을 수 있어서’도 아니다. 그런 인종주의적 표현 행위까지 관용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만드는 것이 상징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볼린저는 관용이 갖는 자기형성적 기능에 주목한다. 극단적 주장에 노출되어도 견딜 수 있고, 흔들리지 않고, 그로부터 반면교사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이 곧 시민적 능력이요 덕성이다. 이런 관용적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는 ‘더 많은 발언과 토론이 가능한 바람직한 사회’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볼린저의 관용사회론은 수정헌법1조에 대한 재해석을 넘어선 새로운 자유론이다. 그의 주장은 밀튼과 아들 밀의 전통에 따른 자유주의를 넘어선다. 그의 주장은 루소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윤리적 공동체론을 갱신한다. 다원적 가치와 이념이 경쟁하고 투쟁하는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볼테르 정신의 21세기 판처럼 보인다.  


볼린저는 언론자유 이론을 사회이론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개개인의 소통적 행위와 그에 대한 관용이 한 사회의 ‘자기 이해’의 수준과 ‘자기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능력을 형성함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언론자유의 이론은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모호한 전제들, 보통법 판례로 축적된 법관과 배심원의 판단들, 그리고 법이론과 독트린을 구성하는 이른바 ‘법적 정당화의 논리’를 포함하지만, 또한 가볍게 그것을 넘어선다. 그는 한 사회가 자유를 권리로 보장하는 방식이 이 그 사회의 자기 이해의 깊이를 나타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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