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양념학 - 간장

오래될수록 깊어지는 감정

by 정담훈

2화. 오래될수록 깊어지는 감정


✒️ 글: 정담훈


오늘 꺼내볼 양념: 간장


간장은 단순히 짠맛만을 품고 있는 조미료가 아니다.

그 짠맛은 하루이틀이 아니라,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완성되는 맛이다.

처음에는 소금물처럼 자극적이고 직선적으로 혀를 찌르지만,

시간이 오래 스며들면 그 안에는 짠맛 너머의 온기,

그리고 짠맛마저 부드럽게 감싸는 그리움이 숨어든다.


겉은 검고 묵직하지만 속은 의외로 온화하다.

향은 묵직하게 퍼져 나가지만, 맛은 절제되어 있다.

그건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만큼 깊어진 것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장독대 앞에서 뚜껑을 여실 때면

나는 그 옆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이 단단하고 그윽하면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건 잘 익었네.”


그 한마디 속에는

햇볕이 스친 날들과 장마를 견딘 시간,

바람이 드나든 계절,

묵묵히 지켜본 기다림이 함께 들어 있었다.


간장은 기다림의 맛이다.

급히 불에 올려 끓일 수도,

억지로 당길 수도 없다.

햇빛 아래에서 조용히 숨 쉬게 하고,

때로는 뚜껑을 덮은 채 며칠이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 안에서 짠맛은 둥글어지고, 맛은 깊어진다.


감정도 그렇다.

어떤 기억은 금세 날아가지만,

간장처럼 익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어지고, 더 선명해진다.

나는 잊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바람에 실려온 냄새 하나가

몇 년 전 그날의 얼굴과 목소리를

입안 가득 번져 오르게 했다.

그때야 알았다.

그 감정은 썩지도 바래지도 않고,

그저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한 사람을 너무 늦게 이해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늘 조용했고,

말보다 눈빛이 앞섰다.

그 눈빛 속의 무게를 그땐 몰랐다.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사람이 나의 하루를

얼마나 부드럽고 조용하게 감싸고 있었는지를.


간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한 방울이 사라지면

그것이 빠진 음식은 모양만 남고, 맛은 비어 있다.

사람도 그렇다.

그가 빠진 자리에는 곧 허전함이 번지고,

그 공백은 아무것으로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간장은 후회와 닮았다.

그땐 짜기만 했던 말,

날카롭기만 했던 표정이

시간이 흐르면 전혀 다른 맛을 낸다.

짠 줄만 알았던 그것이

사실은 따뜻한 온기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나는 이제야 안다.

관계의 깊이는

뜨겁게 타오른 순간보다,

오래된 마음이 부드럽게 스며든 흔적에 남는다는 것을.

그 흔적은 쉽게 설명되지 않고, 쉽게 끝나지도 않으며,

그저 오래된 채로 두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간장이란,

빨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이다.

숨겨둔 말,

미움인 줄 알았지만 그리움이었던 기억,

짠 줄만 알았는데 따뜻했던 시간.

그 모든 것을

천천히, 조용히, 부드럽게

내 안에서 숙성시킨 감정의 색이다.


당신 안에도

아직 열어보지 않은 장독대 하나쯤은

남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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