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단맛부터
설탕은 쓰라린 마음을 억지로 덮는 가짜 포장지가 아니다.
오히려 설탕은, 감정을 부드럽게 감싸서
목에 걸리지 않게 삼키기 좋게 만들어 준다.
우리의 하루에는
짜고, 맵고, 쓰고, 때로는 너무 날카로워
그대로는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말들이 찾아온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설탕을 조금씩 꺼낸다.
말의 끝에, 표정의 온도에, 손끝의 움직임에
작은 단맛을 흘려보낸다.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그 말이 너무 거칠고 단단하면
상대는 상처부터 입는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정답보다 온기(溫氣)와 여지(餘地)다.
어릴 적, 고열에 시달리던 겨울밤이 있었다.
방 안은 전기장판의 열로 후끈했고,
창밖에는 눈발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유자청 병을 꺼내
숟가락으로 한 숟갈 퍼 담았다.
뜨거운 물을 부어 휘저을 때,
스푼이 잔 벽을 스치는 소리가
겨울밤의 적막을 깨웠다.
순간 퍼지는 달콤 쌉싸래한 향.
그건 약 냄새도, 시럽의 인공 단내도 아니었다.
마치 ‘괜찮다’는 말을 향으로 풀어낸 듯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였다.
작은 찻잔을 건네며
“천천히 마셔라.”
그 한마디 안에는
“나는 네 곁에 있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첫 입은 쓰고 뜨거웠다.
그러나 두 번째 입부터는 달았다.
그건 감기약이 아니라
아픔을 잠시 유예시키는 한 모금의 위로였다.
아픔은 잊혀도, 위로는 맛으로 남는다.
진짜 위로는
그 말을 얼마나 잘 들어주는지가 아니라
그 말을 어떻게 감싸주는지에 달려 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많이 힘들었겠구나.”
“나는 네가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이런 말은 짧지만 오래 녹는다.
즉시 통증을 멎게 하진 못해도
가슴 어딘가에서
조금씩 퍼지는 단맛이 된다.
위로는 언제나 진심부터가 아니다.
단미(甘味)가 먼저다.
사람이 먼저 숨을 고르고 나야
진심도 도착한다.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무 말 없이도 알려주는 사람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설탕은
감정의 유예(猶豫)다.
화를 다 내기 전,
서로를 놓아버리기 전,
우리는 먼저 설탕을 꺼낸다.
말투를 낮추고,
표정을 가라앉히고,
침묵 속에 작은 단어 하나를 넣는다.
“그래도, 나는 네가 괜찮아.”
그 한 마디는 설탕처럼 작지만
한 접시의 감정을 끝까지 넘기게 해 준다.
삶에는 설탕 같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덜 아프게 느껴진다.
그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내가 틀리든 맞든
그저 그릇 안에 남아 준다.
그 사람은,
그냥 함께 있어주는 맛이다.
설탕은 길을 바꾸진 않는다.
다만 그 길에서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준다.
위로는 단미(甘味)로 시작해
아무 말 없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단맛이 남아 있는 관계(關係)는
시간이 흘러도 혀끝보다
마음에서 더 오래 녹는다.
설탕은 혀끝에서 사라져도, 마음에서는 늦게 녹는다.
그 느린 단맛이 남아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말을 조금 더 들어줄 수 있다.
언젠가 당신이 누군가에게 작은 설탕이 되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그날이 오늘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