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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가 Nov 12. 2023

16유로로 그리스에서 밥 해 먹기

그리스에서 늦은 여름휴가를 보냈다. 아테네에서 3일, 크레타섬에서 5일을 머물며 스노쿨링을 하고 그리스의 음식들을 잔뜩 먹고 마실 요량이었다. 아테네를 떠나는 날, 비행기를 타기 전 간단하게 그릭 스타일의 아침을 사러 거리를 나섰다. 베이커리로 향하려고 왼쪽으로 꺾는 순간 이게 웬걸! 장터가 열려있는 게 아닌가. 올리브와 치즈들, 신선해 보이는 채소와 과일들이 줄을 지어 즐비해있었다. 이 재밌는걸 지금 발견하다니. 너무 아쉬웠다. 크레타에서도 기회가 있을 거라며 눈물 섞인 발걸음을 옮겼다. 크레타에서 저 마켓을 또 발견하면 내 샅샅이 뒤져 잔뜩 쇼핑을 한 후 밥을 해 먹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수요일 오후, 크레타에 도착했다. 그래서 여기 시장은 어딘데! 구글맵을 켜고 market을 입력한 다음 하나하나 눌러보았다. 하니아에서 가장 큰 올드 마켓은 공사로 당분간 닫는단다. 정말로 시장의 신이 나를 버렸구나... 싶던 찰나 눈앞에 Thursday Farmer's Market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무려 야외마켓이었다.


- 내일 Thursday farmer's market 이 열린대! 여기로 가야 해!


- 우리가 아까 본거랑 비슷한 건가?


- 응, 완전 똑같이 생겼어. 10시에 오픈한대.


- 딱이네. 가자 가자!


목요일 아침, 파머스 마켓으로 향했다. 그렇게 구경해보고 싶었던 야외장터였다. 채소, 과일, 올리브, 치즈, 허브 등 크레타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눈이 제멋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욘도 올리브를 발견하고는 함께 신이 났다.



딱히 생각하는 메뉴도, 필요한 재료도 없었다. 그저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채소와 과일을 즐기고 싶을 뿐. 시장을 둘러보며 그때그때 끌리는 것들을 담았다.


욘의 사랑 올리브, 삼색 가지, 어딘가 다르게 생긴 토마토와 칠리, 탄 듯 구우면 환상의 맛을 자랑하는 칼솟과 어떻게 해 먹는지는 모르지만 검색해 보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산 애호박 꽃도 골랐다. 감자와 아침과 해변에서 먹을 과일들도 샀다. 과일은 사과, 배, 무화과, 복숭아 등 하나씩 집어먹기 편한 것들 위주로 골랐다. 페타치즈도 잊지 않았다. 거침없이 식재료를 사는 나를 보며 욘이 이름 하나를 쓱 붙여주었다. Foody Junga.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너무 적절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와 산 것들을 정리해 보니 둘이서 세끼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격은 더 대박이었다. 저만큼을 샀는데 16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 신선하고 질이 좋은데 값도 싸다니! 크레타에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다.


시내구경을 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채소들을 씻고 다듬고 구웠다. 채소들은 기름 없이 굽고, 감자는 올리브유를 적당히 둘러 구운 다음 오레가노를 뿌렸다. 여기에 식당에서 차지키 소스를 사 곁들이니 세상 천국이 따로 없었다.



꾸밈없지만 정말 맛있었다. 짭조름한 올리브도, 단맛이 많이 나는 칼솟도, 색에 따라 가지도 맛과 질감이 달랐다. 토마토는 찰기가 없고 수분이 좀 더 많았다. 전반적으로 채소의 향과 맛이 진했다. 페타치즈는 설명하기 어려운 맛인데 짠기가 강해서 조금씩 잘라 야채와 먹으면 풍미가 좋다. 애호박 꽃은 처참했다. 튀기거나 전을 부쳐먹는다길래 따라했다가 결국 욘이랑 내기해서 진사람이 하나씩 먹는 벌칙이 되었다. 가끔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과일들은 아침으로 열심히 먹었다. 그리스의 청무화과는 우리나라의 맛과 비슷하고, 홍무화과는 좀 더 달큼한 게 홍시 같은 맛에 가까웠다. 배 맛은확신의 서양배였다. 역시 배는 한국배가 최고다!



남은 페타치즈와 토마토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다 토마토 수프를 끓이기로 했다. 마트에서 팩에 담긴 토마토 주스를 샀다. 식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장을 볼 때는 번역기의 힘을 빌려도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감으로 때려 맞춰야 되는 순간. 음료코너에 있지 않고 팩에 담겨있으며 흔들어봤을 때 자작하게 느껴지는 것이 내가 찾는 게 맞을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날이 약간 쌀쌀한 게 딱 수프 먹기 좋은 날이었다. 어제 사온 토마토 주스를 까 냄비에 붓고 끓이는 동안 남은 토마토와 페타치즈를 큐브크기로 잘랐다. 그저 때려 넣고 끓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조리법. 뭉근하게 끓여 올리브유를 두르고 후추로 마무리하니 제법 그럴싸해졌다.  



얻어걸렸다. 너무 크리미 하지도 않아 깔끔하고 깊은 토마토 수프가 완성되었다. 그저 남은 재료를 처리하려고 시도한 것인데 의외로 훌륭했다. 욘도 맛있다며 그릇을 싹 비웠다. 역시 푸디-정아라며 새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재료가 좋으니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는 느낌이었다. 15.8유로로 장을 봐온 재료들을 야무지게 지져먹고 볶아먹고 끓여 먹었다.


여행지에서 시장을 둘러보는 맛이 여기 있다. 로컬에서 자란 작물은 그 지역의 가장 솔직한 맛을 보여 준다. 내가 느낀 그리스의 맛은 진하고 짭조름했지만 수분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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