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숙성

by 언덕파


마신 와인보다
남겨진 병이 더 오래 남아 숙성되고 있습니다.

라벨은 닳고
코르크는 마른 채로 꽂혀 있고
내용물은 이미 자리를 떠났는데
병들은 아직 줄을 맞춰 서있습니다.

비워졌다는 이유로
역할이 끝난 것 같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그때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맛은 사라졌고
대신 그날의 장면들이 남았습니다.
건배하던 소리,
말이 많아지던 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던 테이블.

와인은 잔에서 끝났지만
병은 아직
그날을 숙성 중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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