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코어를 인정하는 용기 (에필로그)

by 언덕파


골프는 이상한 스포츠이다. 공은 멈춰 있는데 사람이 흔들린다. 잘 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방해가 되고, 어제의 한 번 잘 맞은 샷이 오늘의 무리한 선택을 부른다. 그래서 라운드를 끝내고 나면 누구나 비슷한 변명을 준비한다. 바람이 어땠다, 그린이 빨랐다, 파트너가 어땠다, 컨디션이 어땠다. 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 말로는 다음 라운드가 달라지지 않는다.

스코어를 인정한다는 건 그날의 숫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그 숫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어떤 홀에서 욕심이 났고, 어떤 상황에서 겁이 났고, 어떤 선택에서 미루다가 늦었는지. 스코어는 실력의 총합이라기보다 판단의 흔적이다. 그래서 인정이 어렵다. 인정하는 순간, 핑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도 똑같다. 우리는 성과를 말할 때 늘 외부 요인을 먼저 꺼낸다. 시장이 안 좋았다, 경쟁이 세졌다, 플랫폼이 바뀌었다, 예산이 줄었다. 물론 맞다. 하지만 그 말이 길어질수록 한 가지가 가려진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 선택했는지, 무엇을 버리지 못했는지, 무엇을 정의하지 못했는지. 숫자는 잔인한 편이라, 결국 그 흔적을 숨기기 어렵다. 다만 사람은 끝까지 숨기려고 한다.

내 스코어를 인정하는 용기는, 실패를 자랑하는 태도와 다르다. 그것은 자기 비하도 아니고, 교훈을 팔기 위한 장치도 아니다. 그냥 다음을 위해 현실을 고정하는 일이다.


필드에서 가장 무서운 건 OB가 아니다. OB는 한 번에 끝난다. 진짜 무서운 건 애매한 샷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공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잃고, 리듬을 잃고, 결국 다음 샷까지 망친다. 비즈니스에서도 애매함이 가장 비싸다. 정의가 애매하면 프로젝트가 늘고, 타깃이 애매하면 메시지가 늘고, 목표가 애매하면 데이터가 늘어난다. 그러다 보면 실행은 열심히 아니라 불안이 된다. 불안은 늘 일을 늘린다. 판단은 늘 일을 줄인다.


이 브런치북의 제목을 ‘필드 위의 기획서’라고 붙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골프는 기획서가 없어도 돌아가지만, 스코어는 기획서 없이 좋아지지 않는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캠페인은 굴러가지만, 성장은 기획서 없이 오지 않는다. 기획서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리면, 결국 한 줄로 바꿔도 된다. 오늘 무엇을 할지보다, 오늘 무엇을 하지 말지 정하는 문서. 그 한 줄이 있으면 내일의 선택이 가벼워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남기자면, 스코어를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벌주지 않고 대신 다음 라운드를 가볍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 점수를 받아들이는 순간, 남의 점수에 덜 흔들린다. 남의 기준에 덜 흔들린다. 골프도, 비즈니스도 결국 거기서 안정이 시작된다. 스코어를 속이는 사람은 계속 흔들리고, 스코어를 인정하는 사람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 단단함이, 결국 오래간다.




그동안 '필드 위의 기획서'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 브런치북 《실행하지 말고 판단하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 편은 하나의 상황에서 시작해

(1) 지금 문제를 어떻게 정의할지 (2) 무엇을 멈출지 (3) 무엇을 남길지까지 한 페이지로 끝내려 합니다. 실행은 이미 충분한 분들을 위해, 판단을 가볍게 만드는 글로 다시 뵙겠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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