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슬로건을 바꾸기 전에 포지션을 버려라

by 언덕파

2009년, 도미노피자는 광고 하나를 냈다.

"우리 피자는 맛없습니다."

경쟁사를 공격한 게 아니었다. 자기 피자를 직접 깎아내렸다. 소비자들이 온라인에 남긴 혹평을 그대로 읽어주는 영상이었다. 판지 위에 케첩을 바른 것 같다는 말까지.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습니다."

매출이 올랐다. 주가가 올랐다. 지금 도미노피자는 미국에서 피자헛을 제쳤다. 도미노가 바꾼 건 슬로건이 아니었다. 포지션이었다.


슬로건이 문제가 아닐 때

브랜드가 흔들리면 대부분 슬로건부터 건드린다.

"우리 메시지가 약한 것 같아요."

"경쟁사보다 임팩트가 없어요."

"좀 더 감각적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회의를 한다. 카피라이터를 부른다. 몇 주를 고민해서 새 슬로건을 만든다.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슬로건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슬로건은 포지션을 압축한 문장이다. 포지션이 흔들리면 어떤 슬로건을 써도 흔들린다. 새 옷을 입혀도 몸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포지션이 흔들리는 신호

브랜드 포지션이 무너지고 있을 때 나타나는 신호들이 있다.

첫째, 고객이 "그래서 이게 뭐 하는 브랜드예요?"라고 묻는다. 슬로건이 있는데도 설명이 필요하다면 포지션이 없는 것이다.

둘째, 내부에서 타깃 고객에 대해 다른 말을 한다. 대표는 2030을 말하고, 마케터는 4050을 말한다. 포지션이 합의되지 않은 조직은 슬로건이 열 개여도 소용없다.

셋째,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차이를 한 문장으로 말하지 못한다. 차별점이 없으면 슬로건은 그냥 구호가 된다.

넷째, 슬로건을 바꿀 때마다 잠깐 좋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제자리다. 이건 슬로건 중독이다. 문장을 바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착각이다.


국내 브랜드 두 개가 보여주는 것

방향은 반대다. 그런데 둘 다 맞다.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는 포지션을 지켰다. 1974년 출시 이후 단지 모양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경쟁사들이 파우치, 슬림형, 리뉴얼을 반복할 때 빙그레는 그대로였다. 마케팅 담당자가 바뀌어도, 트렌드가 바뀌어도 "단지"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 결과 단지 모양 자체가 브랜드가 됐다. 슬로건이 필요 없는 브랜드. 모양만 봐도 아는 브랜드. 포지션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곰표는 반대로 포지션을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확장했다. 70년 된 밀가루 브랜드가 어느 날 맥주를 냈다. 팝콘을 냈다. 패딩을 냈다. 처음엔 다들 이상하다고 했다. 근데 팔렸다. 곰표가 지킨 건 밀가루 포지션이 아니었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오래됐지만 힙한" 감성 포지션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밀가루 바깥으로 나가도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았다. 빙그레는 포지션을 지켜서 살아남았다. 곰표는 포지션을 재정의해서 되살아났다. 공통점은 하나다. 슬로건보다 포지션을 먼저 결정했다.


포지션을 버린다는 것

도미노피자가 한 일은 단순했다. 패스트푸드 피자 1위라는 포지션을 버렸다. 대신 진짜 피자를 만드는 브랜드로 다시 섰다. 이 결정은 슬로건 회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경영진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정의하는 데서 나온다. 회의실이 아니라 거울 앞에서 하는 작업이다. 포지션을 바꾸는 건 두렵다. 기존 고객을 잃을 것 같다. 지금까지 쌓아온 걸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 슬로건만 건드린다. 덜 무섭고, 더 빠르고, 결과가 눈에 보이니까. 맞다. 실제로 일부는 잃는다. 근데 포지션 없이 계속 슬로건만 바꾸면 모두를 잃는다. 서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로건보다 먼저 해야 할 질문

슬로건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1) 우리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2) 그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3) 경쟁사와 우리의 차이는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에 답할 수 있다면 슬로건은 저절로 나온다. 답하지 못한다면 슬로건 작업을 시작하지 마라. 포지션이 먼저다. 슬로건은 그다음이다. 판단이 먼저다. 제작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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