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Against All Odds
2023년 한 해가 저물 시점에 그간 끌고 오던 투자자와의 논의가 종결되었다. 나는 투자를 받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편안한 연말을 맞이했다.
벤처투자자와는 3분기부터 논의를 진행해 왔었다. 매우 소모적이고 지리한 과정이었고 언제나 그렇듯 사업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설명해줘야 했다. 총 10 차례가 넘는 미팅과 화상미팅, 제품시연과 심지어 식사까지, 이메일로 주고받은 횟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내가 쏟아부은 시간은 모두 40시간은 족히 넘을 것이었다.
모든 지표와 결과들이 명확했기에 이성적인 사고 하에서는 투자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모두들 그런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과정의 마지막에 그들이 내민 패는 3년 전의 가격으로 투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어이없는 결과를 맞이하니 기운이 빠졌다. 아니 그보다 실망스러웠다. 리스크를 테이크해야 하는 국내 벤처투자자들이 향후 성장 가능성보다 투자 단가를 더 의식한다니.
하지만 허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행을 좇는 그들의 민낯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같아서 오히려 고마웠다. 그간의 내적 갈등 - 자본으로 성장할 것이냐, 스스로 일어설 것이냐의 문제 - 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어 더할 나위 없이 모든 게 투명해졌다.
23년도는 사업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금 치열하게 고민하는 한 해가 아니었나 되돌아본다.
2019년 자금을 태워서 성장하는 Cash Burn 모델을 선택한 후 회사는 매출보다 먼저 지출이 커졌고 커진 지출을 메꾸기 위해 4년 동안 자금을 구걸하러 다녔다. 기관투자를 활용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어느 순간 나는 자본으로 인한 풍요에 중독되어 있었다. 자유로워지고자 큰 뜻을 품고 사업을 일으켰는데 다시금 돈이라는 자원에 종속된 꼴이었다.
결국 회사가 단단하게 굳기도 전에 쉽게 얻은 자금은 너무도 빨리 고갈됐고 그에 따라 큰 희생도 치러야 했다. 40%에 달하는 구조조정, 임직원들의 감봉, 복지예산의 삭감 등.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장 끔찍했던 것은 내가 틀린 건 아닌가 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 나를 계속 괴롭힌 점이었다. 불면증과 여러 병치레로 한 해 동안 내 책상 위에는 거의 항상 약봉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 것처럼 어둡고 컴컴했던 터널도 결국 끝이 있었고 4분기에 결국 우리는 3개월 연속 흑자를 달성해 냈다. 그리고 1년에 10개도 뽑지 않는 우수기업으로 선정되어 보증기관으로부터 큰 자금을 보증받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고통의 순간에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처음부터 그런 자세로 매 순간 사업에 임했더라면 훨씬 좋은 커브를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반성해 본다. 비용을 줄이고 돈을 버는 것은 사업의 본질이고 이는 미국이 금리를 올리든 긴축재정을 하든 대통령이 누구든 변함없는 원칙 아닌가.
연료가 떨어진 마지막 순간에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붙잡고 다시금 회사를 이륙시킨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몸에 문신이라도 하나 새길까 싶다).
우리는 모두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는 법이란 없다. 다만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울 뿐이다. 지난해 나는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법을 배웠고, 아직도 핏자국이 흥건한 마음의 상처를 여러 바늘 단단히 꿰맸다.
기업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이윤을 남기지 못하면 존속할 수 없다. 풍요로웠던 시절 잘못 형성된 관습은 버리고 앞으로 무엇보다도 미래 성장을 위한 담보를 구걸하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을 바꾼 이제부터가 본게임이고 진검승부다.
2024년에 우리는 온전한 흑자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다. 국내 1위의 사업자 지위를 넘어서 대국민 서비스로 거듭날 것이며 글로벌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것이다. 지금까지 상상했던 서비스를 모두 현실화시킬 것이고 이는 또다시 최초이자 국내 유일한 서비스로 안착할 것이다.
스타트업으로 7년간 폭풍질주했던 우리는 이제 이윤창출이라는 기업의 본연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