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느린 정의>를 읽으며 생각한 것

by 정다운


나의 유튜브 구독 목록은 대체로 나와 조금 다른 사람들이다. 20대 알바생, 퀴어, 장애인, 투병 중인 사람들... 모두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글과 책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글보다 영상이 쉬운 시대이고, 지금은 모두가(모두는 아닐 수도 있겠다) 영상을 찍고 유튜버가 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클릭 한 번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더 잘 알고 싶고, 가까이서 보고자 하고, 그들에게 세상이 좀 더 너그럽길 바란다. 하지만 그 바람 안에는, '나는 구독자다. 모니터 너머에 있다. 그들은 내가 아니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다. 타자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들이 타자라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비장애인 40대 프리랜서이고, 지역에 거주하는 무자녀 기혼 여성이다. <가장 느린 정의>에서 말하는대로면 펨(부치/펨의 펨보다 광의의 의미로 이해했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노화로 인해 각종 만성 질환들을 가지게 되어 컨디션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양이와 하고 싶은 일을 부지런히 쫓아와 만나게 된 지금의 나의 뜻밖의 초라함이다. 늙은 고양이와 초라한 내가 한 방에서 하루 종일 함께 지낸다.


20대 초반에는 인서울 4년제 대학생이었고, 30대에는 대기업 직장인이었고, 세계여행자였다. 낯선 곳에 가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삶의 크고 작은 변화에 금방 적응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했으며, 언제든 내가 일할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모두 과거형이다. 그때의 나는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걸음이 빠르다. 성큼성큼 걷는다. 성격이 급하고 컨트롤 프릭이 있어 천천히 걸어 보행에 지장을 주는 사람과 천천히 달려 주행을 막는 자동차를 답답해하고,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되지 않는 일에 한심해하고 쉽게 짜증이 난다. 그럴 때 나는 지나간 내가 된다.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메고 어디든 다녔던 두 무릎이 비교적 튼튼했던 내가 된다. 그러다가도 다가올 미래의 나를 떠올리며 금세 주저앉는다. 지나온 나, 지금의 나, 다가올 나... 여러 나를 데리고 살고 있다.


다가올 나... 언젠가 노년이 될 거고, 높은 확률로 장애인이 될 거고 여전히 직장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아니 폐를 끼칠 남조차 없으니 나의 노년은 내가 스스로 돌봐야 한다. 그 막막함에 종종 압도되기도 한다. 나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 '유명 작가'도 되지 못한 나는, 언제까지 일을 하고 언제까지 아프지 않고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 싶은 것들을 헤아리며 살 수 있을까.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자신이 없고, 아니 자격이 없는 것 같고.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월급이 나의 쓸모를 증명해 주는 걸. 아, 그런데 내가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닌데. 하지만 곧 노년이 되겠지.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면 좀더 돈이 필요해.


<가장 느린 정의>를 손에 쥐었고 단숨에 읽었다. 이렇게 허겁지겁 읽을 책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허겁지겁이나마 읽어서 다행이다. 나의 모든 고민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은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나는 밑줄을 그으며 듣는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장애 정의는 거리가 있지. 이 책에서 말하는 장애 정의를 나 역시 꿈꾼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 삶에서도 내 삶 밖에서도 장애정의를 전혀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언제든 내가 가장 느린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다. 나는 지금의 초라한 나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나는, 가장 느린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 내 주변에서 가장 느린 존재는 내 고양이다. 고양이를 보며 나는 나의 노년을 떠올리곤 한다. 그럴 때면 언제나 막막해지곤 했는데, <가장 느린 정의>를 읽고 조금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하루에 몇 시간을 고양이를 위해 쓴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이고, 얼굴에 흡입기를 대주고, 신선한 물을 수시로 가져다주고, 온도와 습도를 체크한다. 작은 소리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나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그런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보지 않았다. 고양이 역시 그럴 것이다. 높이 뛰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다가도 다리가 아파 잠시 쉬어야 하고, 소화가 잘 안되고, 가끔 숨쉬기가 힘들지만, 그렇지만 고양이는 나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저 존재하고 있을뿐. 고양이를 향한 나의 사랑이, 다른 모양으로 다른 크기로 어디에든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를 구체적으로 그려 보다 보면 금세 회의적이 되기도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믿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주변 지인들에게 많이 선물하려고 한다. 우리 함께 서로를 돌보며 무사히 아니 고약하게 나이 들어 볼까? 한 밤중에 나를 깨워 뻔뻔하게 물을 달라고 소리 지르는 내 고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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