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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Apr 11. 2023

아상, 허상, 두려움

5년간 꾸역꾸역 붙잡고 있던 스타트업을 그만하기로 했을 때 난 두려웠다.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 내 인생이 망해버렸다는 생각, 5년의 긴 시간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 앞으로 이렇게 쭉 내리막길을 치닫다가 영원히 실패자로 남을 거란 생각, 주변 사람들에게 떵떵거릴 수 없다는 생각, 내밀 명함이 없는, 그렇다고 달리 하고 있는 것도 없는 백수가 될 거란 생각,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생각, 서른셋의 나이에 좋은 직장, 그러니까 안정적이고 고연봉에 자유로우면서도 남들이 봐도 부러워할 만한 직장을 찾지 못하리란 생각, 직장 생활을 하기엔 분에 차지 않는다는 생각,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할 것 같은 생각, 곳곳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는 친구들과 달리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 결혼 2년 차에 실패한 커리어를 가진 부끄러운 남편이 되었다는 생각, 불행 속에 살 것 같은 생각에 오랜 시간 괴로워했다. 괴로운 만큼 오랜 시간 삶을 탓했다.



돌이켜보면 두려움은 나에 대한 집착, 아집이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특정한 상에 대한 집착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어야 하고 등등. 어떤 상 하나를 만들고 그에 집착하면 그것 하나에만 집착하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론 그에 반대되는 상 역시 집착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라면, 반대로 나는 저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저런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집착은 동시적으로 이중적이다. 한 면을 원하는 듯 보여도 동시에 반대쪽 다른 면의 부정을 원하는 것이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어야 해,라고 말한들, 그것은 반대로 나는 저런 사람이야, 나는 저런 사람이어야 해라고 외치는 꼴이다. 내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에 집착할 때, 나는 동시에 내 인생은 망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고, 내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집착할 때, 동시에 나는 무능한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공과 실패, 유능과 무능이라는 흑과 백 그 유치 찬란한 이원적인 견해에 나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나는 무능한 사람인가, 유능한 사람인가? 무능하기도 하고 유능하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때에 따라,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뿐이다. 그리고 때가 변하고 조건이 변하면 무능이 유능이 되기도, 유능이 무능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유능과 무능은 대체 무엇인가? 산업의 역군으로 고액 연봉을 받으면 유능한 것이고 시골집에서 낮엔 소를 돌보고 저녁에 시를 쓰면 무능한 것인가? 한쪽으로 유능한 것이 반대쪽으론 무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껏 충분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렇기 때문에 유능도 무능도, 한 상과 그에 반대되는 상 역시 절대적이지 않으며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일 뿐이다.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 과연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리는 그 이름처럼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아닌가? 그리고 유능이고 무능이고,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분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라서 특정한 상에 의거해 나를, 너를, 우리를, 이 세상을 특정한 상으로 고정 지으려는 모든 시도는 부질없는 것이다. 상은 상일뿐이다. 아상에 부합하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공포, 두려움, 그것은 허상이다. 애초에 아상 자체가 틀려먹었기 때문이다. 나도 없고 상도 없으니 아상은 곧 허상이다.



짐승은 제가 굶고 있을 때 또는 공격받을 때에만 다른 짐승을 공격한다. 짐승은 제 신체에 위협이 닥칠 때에만 공격한다. 이것은 실존적인 위협, 실존적인 두려움의 발로이다. 따라서 이때의 두려움은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내 아상에, 진짜 내가 아닌 것에 닥친 위협에 기관총을 갈기진 않았던가? 내가 아닌 것과 나를 같은 것이라 여겨 그 허상을 깨부수는 모든 선한 시도들에, 그 모든 선한 마음들에 되려 위협을 가하진 않았던가? 그것만이 나를 지키는 것이라 여겨 사실 그것들로 인해 나는 파괴된 것이 아닌가? 나를 위한다는 것이 사실은 나를 부숴버린 게 아니었던가? 아, 나는 나를 지킨다면서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었구나. 농약이 뚝뚝 고이고 흘러 강이 되어버린 이 자리에 생명이 자랄 수 없구나.



두려움은 결국 아집이다. 내가 나라고 규정한 상에 집착해 붙들고 있다가 어떤 이유로든 상이 현실이 되지 않을 때 두려움이 몰려온다. 두려움은 허상에 대한 집착이다. 희망하는 상에 대한 집착이다. 내가 원했던 내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는 때, 그것은 희망의 좌절 그러니까 절망이지 두려움은 아니다. 절망과 두려움은 명백히 구분된다. 절망이 급성질환이라면 두려움은 만성질환이다.



좌절감은 분명 내가 쪼그라드는 것이지만 두려움은 쪼그라진 내가 여기서 더 쪼그라들어 그것이 변하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공포다. 쪼그라들고 또 쪼그라들어 한 줌 먼지가 되더라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한 공간, 잠재성이라 부르기도, 미래라 부르기도, 희망이라고, 변화의 씨앗이라고도 부르는 것, 그 모든 여지를, 그 너른 대지와 공기, 빛과 온기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겪어보지 못한 것, 미지에 대한 공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 생각이 비극 드라마에 재생 버튼을 누르면 마치 그것이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인 것처럼 두려워했다는 것. 두려움은 생각, 좀 더 정확히는 망상일 뿐이라는 것임을, 몰랐던 것을 몸소 겪어서 체득하게 되는 순간 두려움은 일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많은 세월 속절없이 괴로워했다. 그 긴 시간 나는 눈앞에 닥친 상황 그 자체보다 생각 속에 살았던 것이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 집중하는 것보다 망상을 거듭하는데 더 공을 들였다. 생각에 잠식되지 않고 조금 더 건설적인 창조 활동에, 내가 조금 더 지혜로워지기 위해 생각을 이용했어야 했다. 생산적이고 능산적인 것에 충분히 소진되지 못한 소비적이고 소산적인 나, 생각은 끊임없는 망상 제조기가 되어 한국은행 인쇄기처럼 롤러를 돌려 두려움을 찍어냈다. 끝도 없이 치솟는 두려움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두려움 뒤에 아상을 점검해야 한다. 과연 좋은 것은 무엇이고 나쁜 것은 무엇인가? 좋은 것이 좋기만 하고 나쁜 것은 나쁘기만 한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한 때 나타났다 휘발하는, 그 모양도 내용도 없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한낱 견해에 불과한 것인데, 좋은 것만을 취하려 하는 것도 나쁜 것을 피하려 하기만 하는 것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두려움 뒤에 숨어있는 설렘을 봐야 한다. 두려움 대신 설렘을 택해야 한다. 두려움과 설렘은 같이 다닌다. 어쩌면 두 얼굴을 갖고 있는 하나의 감정이다. 설렘과 희망은 다르다. 희망은 명확한 목표와 목적, 뚜렷한 얼굴처럼 그 상이 분명하다. 설렘은 목표도 목적도 얼굴도 없이 온다. 설렘은 가볍게 불어오는 봄바람과 같이 언뜻언뜻 온다. 온기로 온몸을 간지럽히다가 붙잡으려 하면 이내 달아난다. 그럼에도 설렘을 보라. 설렘을 느껴라. 설렘에게 가라. 아집을 내려놓을 때 설렘이 온다. 설렘의 등에 올라타라. 설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쉽게 예단하지 마라. 그 끝은 설렘도 모른다. 설렘은 내가 그 아무것도 아님이자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음, 그 절박한 표현이다. 생의 본질, 그 진리 자리에서 용암처럼 끌어올라 거대한 파도처럼 내게 덮쳐오는 포효다.



자유로움을 느낀다.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서. 좋은 사람이기도 나쁜 사람이기도 하다는 증거가 삶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 별 볼 일 있는 사람인 줄로 스스로를 속이고 속였는데,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사람이어서, 그렇지 않기도, 그렇기도 한 사람이어서, 그 모두라서.



그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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