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도 따지고 따지다 보면 그 바닥에는 바라는 마음이 있다. 내 삶이 이러하고 저러하길, 이런 일 저런 일이 없길, 이런 거 저런 거 가질 수 있길, 이런저런 고통은 없길, 이런 사람 말고 저런 사람이 되길, 내 친구가, 연인이, 어떤 사람이 되길, 이런 사람은 싫으니 내 앞에서 사라지고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길, 세상에 갈등 없고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길, 뭐 그런 마음들. 그런 시답잖은 욕심들.
교미가 끝난 스프링복 암사마귀는 숫사마귀를 잡아먹는다. 화면으로 "참혹한" 현장을 지켜보는 나는 눈을 찌푸리지만, 그런다고 죽은 숫사마귀가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니고 암사마귀가 미안하다며 다신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 것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있는 것, 그러니까 내 이해의 바깥에 있지만 두 눈앞에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것, 암사마귀가 숫사마귀를 잡아먹고 있는 것, 그것은 엄연한 자연의 실상이다. 그것에 "참혹함"을 느끼거나,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며 혀를 끌끌 찬다거나, 암사마귀를 욕하고 숫사마귀를 타박하는 것,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갤 젓는 것, 그렇게 실상을 부정하려는 마음, 그것은 헛되다. 제아무리 두 눈 가리고 아웅 해봤자, 벌어지고 있는 것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아름답지도 더럽지도 않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공원은 인간이 보고 싶은 것만을 관상하기 위한 인공물일 뿐, 그것이 자연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한그루, 꽃 한 송이는 자연 그 자체지만. 자연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있는 곳도, 보기 싫은 것이 없는 곳도 아니다. 그곳엔 바라는 마음이 없다.
인간의 개념으로는 이기주의, 그러니까 토끼풀이 제 꽃 피우느라 바빠서 옆에 있는 나무의 열매 맺음에 무심한 것, 그것이 자연이다. 토끼풀은 옆 나무의 열매에 관심이 없다. 토끼풀이 맺은 그 흰 토끼의 하얀 궁둥이처럼 방긋한 꽃의 수분이 날아가 나무의 열매가 맺는데 도움이 되길, 토끼풀은 바라지 않는다. 바라거나 바라지 않음이 없다. 그러니까 토끼풀은 제 할 일을 하고 나무는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이곳에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 토끼풀의 수분이 내 꽃의 암술에 다다라 큼지막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길 나무가 바라는가? 그 큼지막한 열매를 가지고, 여기 보시오 여러분, 동네 사람들, 이 열매를 보시오, 이게 내 열매란 말이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열매요? 이런 열매를 만들어낸 나란 나무는 얼마나 대단한 나무요? 오늘이 있기까지 지난 차디찬 겨울을 내가 어찌 버텼는지 아오? 그 고된 세월을 아는가 말이오? 내 말 듣는 사람 아무도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으니 인스타 라방을 켜겠소, 지구 반대편 이들에게 이 탐스러운 열매들을 꼭 보여줘야겠단 말이오,라고 나무가 말하는가?
나무도 토끼풀도 아무 말이 없다. 바라는 마음 없이 바라는 상없이 묵묵히 제 할 일을, 제 할 일만, 제 본성대로 한다. 바람도 맞고 비도 눈도 맞고 햇살도 달빛과 서리도 맞으면서 제 할 일만 한다. 그 모든 것들에 개의치 않으면서. 그래서 자연에는 고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되려 진짜 고통이 존재하는 유일한 곳은 지금 이곳에 고통이 가득하다는 마음, 내 안에 고통 없길 바라는 마음, 그곳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