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 너무 펑퍼짐한 바지를 주문했다. 온라인 쇼핑은 이래서 어렵다.
*
라떼는, 그러니까 내가 어릴 때는, 펑퍼짐한 힙합 바지가 인기였다. H.O.T의 위아더퓨처 댄스를 따라 하며, 윈드밀이라는 댄스기술을 연마하려고 집에서 이불을 깔아놓고 버둥대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에 기장을 줄인다는 개념이 없다 보니 바지 뒤를 신발 뒤꿈치로 맨날 씹어서 너덜너덜했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때는 스키니진이 유행을 탔었다. 그때는 삐쩍 마른 주제에 뭘 믿고 딱 붙는 바지를 입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자취방에서 바지를 입을 때마다 허벅지가 껴서 낑낑대던 기억이 난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이제 다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펑퍼짐한 바지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옷차림이 되었다. 특히 10대~20대는 청바지를 스키니로 입는 경우를 찾기가 힘들다.
나는 달라붙는 옷차림이 외면받는 요즘 트렌드가 내심 좋다. 딱 붙는 옷들은 너무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편한 것이 최고다. 나이를 먹을수록 틈틈이 하는 헬스와 러닝만으로는 군살을 완전히 없애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이유 중 하나다.
패션을 위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패션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패션에 대한 평가점수는 달라진다. 내가 아무리 불편을 감수한들, 항상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불확실한 패션보다 확실한 편안함을 선호하게 되었다. 스키니진을 입고 밥을 먹은 후 배가 꽉 끼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의 펑퍼짐한 바지는 패션도 추구하는 동시에 편안함도 추구할 수 있는, 훌륭한 아이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접근하기에는 무리로 느껴진다. 너무 꾸러기스럽게 보일까 걱정되는 탓이다. 아무도 신경 안쓰는 주말에도 적당한 품의 트레이닝 바지와 맨투맨 정도로 타협한다. 출퇴근용 슬랙스는 너무 딱 붙지도, 그렇다고 너무 펑퍼짐하지도 않은 중간 수준의 통만 돌아가며 입고 있다.
*
지난주 쿠폰 할인가에 이끌려 넋이 나간 듯 회사 출근용 슬랙스를 구매했다. 그런데 배송을 받아보니 하필 제법 펑퍼짐한, 와이드핏이었다. 낭패다. 한 번도 회사에 입고 간 적이 없는 스타일이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직장인으로서 나의 페르소나는 프로페셔널한(?) 이미지 구축을 지향한다. 그래서 회사에는 최대한 포멀한 복장으로 출근하곤 한다. 매일 다양하게 코디하기는 어려워서 크게 고민할 일 없는 검정니트를 즐겨 입는다. 바지는 아까 얘기한 보통 기장과 보통 품의 슬랙스다. 무난하고 깔끔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다.
*
조금 다른 얘기인데, 옷차림을 신경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금방 타인을 판단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성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면접 장면에서였다. HR을 하면서 다양한 면접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는데, 대부분 잘 준비된 답변을 하기 때문에 대답만으로는 변별력을 갖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복장, 말투, 표정의 차이가 당락을 결정한 경우도 제법 있었다.
*
와이드핏 바지를 받아 들고 느낀 당혹감 덕분에 지난 면접 장면들까지 한바탕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이제는 오히려 마음 한편에서 '한 벌 정도는 괜찮잖아?' 하는 반항심이 올라왔다. 옷차림이 대수인가, 맨날 펑퍼짐하게만 입을 것도 아니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매일 면접 보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언젠가 입을 거라며 사둔 조금 튀는 푸른 파스텔톤의 셔츠처럼, 펑퍼짐한 슬랙스도 언젠가는 입기로 하고 옷장에 모셔두면 될 것이다. 모셔뒀다가, 입고 싶을 때 그냥 꺼내 입으면 된다. (작년에 산 그 셔츠를 아직까지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는 것은 문제지만)
사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더 큰 이슈는, 이 옷을 환불하는 과정이 너무 귀찮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환불 택배를 신청하고 크기에 맞는 박스를 찾아서 포장해야 한다. 게다가 왕복 배송료도 내가 부담해야 하고 나는 또 다른 바지를 사기 위해 쇼핑몰을 뒤져야 한다. 나는 그렇게 번거로운 과정과 비용을 부담할 만큼 환불을 하고 싶은 걸까. 그리 비싼 옷도 아닌데 말이다.
*
결론을 내렸다. 회사에서의 이미지 관리까지 운운하며 바지를 환불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자의식 과잉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 당장 옆 팀원이 1주일 전에 무엇을 입었는지도 기억 못 하는 우리다.
펑퍼짐한 바지든 맨투맨이든 회사의 규정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뭘 입든 나의 자유다.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이미지보다는 내가 프로페셔널한 것이 더 중요하다. 보이는 것에 신경 쓸 에너지로 운동이라도 조금 더 하자.
과감하게 바지의 택을 끊어 버렸다. 이제 환불은 안 된다. 이 와이드핏 슬랙스는 내 옷이다. 더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쩌면 편안함이 패션을 또 이겨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Unsplash의 ShuAng 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