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고민을 조금은 덜어드리겠습니다.
나의 앞니는 보통의 치아보다 크기가 큰 토끼이빨이다. 어릴 때부터 토끼이빨은 내겐 익숙한 치아였다. 엄마와 그 모양이 거의 100% 똑같기 때문이다. (유전의 힘!) 자라면서 나와 같은 치아를 가진 엄마를 보고 자랐으니 어색할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돌출된 것도 아니고 크기가 좀 클 뿐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문제는 토끼이빨 양옆에 난 두 개의 치아였는데, 크기가 정상 치아보다 훨씬 작다. 오른쪽은 작은 대로 그렇다 치는데, 왼쪽 치아는 살짝 대각선으로 삐뚤어져 있어 활짝 웃은 사진을 볼 때면 약간의 공백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이 삐뚤어진 치아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라미네이트라고 해서 치아를 가지런하게 하고 나오는 연예인들은 TV만 틀면 만나볼 수 있다. 가지런한 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내 마음 한편에 자리를 잡더니 점점 더 영역을 키워갔다. '나도 저렇게 가지런한 치아를 갖고 싶어. 웃었을 때 더 이뻐 보이고 싶어.'
강렬한 욕망은 행동을 부추기는 확실한 동기가 되어준다. 인터넷을 통해 라미네이트 정보를 찾다 보니 앞니 양옆으로 이가 정상 치아보다 작게 난 치아를 '왜소치'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왜소치 라미네이트'를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은 상담을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에서 라미네이트로 유명하다는 치과에 예약했다.
마침 쉬는 날이 있어 이날을 치과 방문일로 정하고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올랐다. 압구정에 위치한 병원이었는데 조금 일찍 도착해 근처 카페로 갔다. 근데 생각해 보니 가격도 안 물어보고 예약부터 잡았던지라 병원에 전화를 걸어 가격을 문의했다.
"저희는 원장님이 워낙 잘하시고 해서 다른 병원 하고는 조금 달라요. 치아 하나당 100만 원 생각하시면 돼요."
세상에. 가격 조사도 안 하고 방문예약부터 잡은 나란 여자. 가격을 듣고 내가 생각했던 (50만 원 선 정도면 되는 줄 알았다) 가격과 너무 차이가 나서 당장 방문 예약을 취소했다.
서울은 너무 비싸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동네 병원 가운데 라미네이트 사례를 소개한 블로그를 중심으로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무모한 방문예약 경험을 토대로, 사전 전화 조사도 꼼꼼히 했다. 가격도 물어보고 부가세 포함인지 아닌지도 물어보고 하면서 몇 군데를 추렸다. 그중 한 군데 예약을 잡고 방문했다. 치아 사진을 찍고 나니 상담 실장이라는 분이 나를 조그만 방으로 부른다.
"아무래도 라미네이트는 두께가 있어서 조금 깎아야 하긴 하는데 여기 빈 부분이 채워지면서 만족감이 크실 거예요."
속으로 내가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사라질 거라고 하니 쾌재를 불렀다.
"근데 왼쪽이랑 오른쪽이랑 잇몸 모양이 다른데 이건 어떻게 하나요?"
"이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희가 맞춰서 잇몸 성형을 먼저 하고 진행할 거예요. 오늘은 잇몸 성형만 하고 아물면 다음 주에 치아삭제하고 본뜰게요."
그리하여 잇몸의 아주 작은 부분을 삭제하는 진료(?)를 받았다. 그런데 아물고 보니 오히려 삐뚤어진 치아가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 같고 높이도 안 맞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병원을 방문해 라미네이트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하고 예약금으로 걸었던 10만 원을 환불받고 나왔다.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자꾸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지 않자 내 마음의 조급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생각했던 라미네이트가 이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생일대의 과제가 되어 있었다.
'안 되겠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라고 했지'
다시 인터넷으로 서울의 라미네이트 전문 치과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내 마음을 사로잡는 블로그가 있었으니, 그 블로거 역시 앞니가 나비모양으로 들려 있어서 앞니 라미네이트를 찾다가 해당 치과를 찾았다고 했다. 병원의 실명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블로거가 올린 치과 대기실 사진을 추적해 어떤 치과인지를 찾아내는 놀라운 탐정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 바로 여기야!"
나의 추진 속도는 탄력이 붙었다. 점심시간으로 방문을 예약해 치과를 찾았다. 역시, 라미네이트 전문병원(?) 답게 치아 사진만 찍는 사진사가 따로 있었다. 남자 사진사는 하루에도 수십 번 같은 멘트를 외치는 듯했다. "조금만 더 크게 아~~~ 좋아요! 왼쪽으로 쭉~~ 당겨볼까요? 네~찍겠습니다. 하나 둘~ "
앞니를 중심으로 치아 위아래 양 옆을 구석구석 찍은 후 상담실장과 만남이 이어졌다. 내 치아 사진을 본 상담 실장은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소치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으시네요. 저희 병원은 왜소치 전문이에요. 일도 아니야. (웃음) 잘 오셨어요."
그러더니 이내 병원 원장이라는 분이 나타나 치아를 보고는 본인은 6개를 추천한다, 못해도 4개는 하는 게 만족도가 높으실 거라고 말했다.
"저는 왜소치 삐뚤어진 것 때문에 온 거라 2개 생각하고 왔는데, 2개만 하면 이상할까요?"
그러자 상담 실장은 특별히 무료로 본뜨기를 2가지 버전으로 해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이렇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상담 실장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이패드에 서명을 하라는 곳에 서명을 하고 치아 2개 가격 130만 원가량을 결재했다.
본을 뜨고 집에 돌아왔다. 이제 나도 가지런한 치아를 가지고 활짝 웃는 날이 많아지겠지?라고 상상하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새로운 나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이제 다음 주에 가서 모양을 보고 2개를 할지 4개를 할지 결정하면 되는데, 왠지 모르게 조금 더 검색을 하고 싶어졌다. 네이버로만 검색했으니 유튜브도 한번 찾아봐야지 하며 유튜브를 열었고 나는 그 유명하다는 [강유미가 라미네이트 하고 싶은 당신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것 6가지] 영상을 보고야 말았다.
강유미는 영상에서 앞니 12개를 라미네이트하고 10년이 지나 교체 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러웠던 경험담을 담담히 소개했다.
<라미네이트 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
치아는 재생되지 않는다. 치아는 손톱이 아니다.
치아 삭제량은 최소화해야 한다. 확인 안 하면 골룸 되기 십상이다.
보철물 교체할 때 힘들다. 접착제 때문에 치아 삭제량 또 발생한다, 신경이 건드려지기도 한다.
신경치료 성공률은 100%가 아니다. 겨울에 웃기만 해도 이가 시리다. 신경 치료는 신경 삭제를 의미한다.
라미네이트 하면 치과 갈 일이 많아진다. 언젠가는 교체를 해야 하고, 신경치료, 잇몸.. 등
사람들은 여러분의 치아에 관심이 없다. 병원에서는 여러 개를 권한다. 멀쩡한 치아까지 희생된다.
예전에 유명했던 영상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이걸 이제야 보다니. 3000개 가량 달린 댓글을 밤새워 다 읽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짓이 라미네이트라는 무시무시한 댓글들을 보니 내 치아를 그대로 간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서서히 깨닫게 됐다.
요즘 병원에서는 무삭제다 최소 삭제다 하면서 홍보하는데, 아무리 치아 삭제를 안 한다고 해도 10년 주기로 교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때 접착된 부분을 제거하면서 무조건 치아 삭제가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내 나이가 아직 40도 안되었는데 이걸 4~5번 하게 되면 이 조그만 왜소치는 도저히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1969년에 선보인 분노(사망)의 5단계 모델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을 5단계로 구분 지어 놓은 것이다. 그 과정은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인데, [라미네이트 사건]을 통해 하는 이 과정을 하나 하나 몸소 경험했다.
부정: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카드 3개월 할부로..... 아니야... 뭔가 잘못된 걸 거야. 라미네이트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괜찮으니까 하는 거지.... 이상한게 아닐거야..
분노: 아니 치과 의사라면 환자의 치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조언을 제대로 해야지. 어떻게 6개씩 다 갈아엎으라고 말하지? 제대로 된 의사라면 그럴 수 있는 거야? 자기 이빨 아니라고 막말하는거 아니야?!!
협상: 그래도 일단 내 치아를 건드린 건 아니니까... 최대한 환불해 달라고 하자.. 전화해 보자..
우울: 그때 서명하면 환불 안된다고 했는데... 망했어. 바보 멍청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런 짓을 하다니... 아까운 내돈... 난 진짜 바보야...
수용: 20~30만 원 빼고 환불해 준다고. 그래 그게 어디야.. 그렇게 해달라고 하자. 받아들이자. 인생공부 했다고 생각하자. 다시는 이를 건드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리하여 나는 일정 금액을 차감한 돈을 환불받기로 하였고 (환불 과정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렇게 나의 토끼이빨과 왜소치를 지켜낼 수 있었다. 라미네이트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를 깎아내고 결국 뽑아야 하는 상황까지 간다는 무시무시한 후기 댓글들을 읽고 나서야 내 잘못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바퀴가 빠져나갔고,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전차를 멈출 수 있었다. 이런 뼈아픈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 앞니가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 역시 지난해부터 가지런했던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오고 있다. 맨 가운데 난 앞니를 보니 내 아들이 100% 확실하다. 아들이 평생 사용하게 될 영구치의 앞니가 나랑 똑 닮았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의 계보를 이어 우리 아들 역시 토끼이빨을 갖게 된 것. 나는 요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엄마 봐봐, 토끼이빨 진짜 멋지지? 이건 진짜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나오는 거야. 아무나 가질 수가 없는 거거든. 레어 아이템 같은 거지. 우린 진짜 특별하지?"
(엄마의 좌충우돌 라미네이트 에피소드는 아들에게 비밀로...)